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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장

제목
사랑장(14)  [고전 13:4-5]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9.04.03
흔히들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을 하는데 공부를 잘하려면 반드시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랑과 반대되는 마음은 버리고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힘써 나가야 합니다. 행하려고 열심히 노력해 나가면 결국은 반드시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하신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의 유익보다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러 가서 메뉴를 고르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영적인 사랑을 이룬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꼭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자고 주장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기는 하지만 마음이 기쁘지는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항상 상대의 의견을 먼저 묻고 다른 사람이 고른 메뉴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늘 즐겁게 식사합니다.
누가복음 14:10에"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했습니다. 식사할 때 늘 남에게 선택권을 양보하는 사람이라면말석에 앉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석에 앉으면 제일 낮은 사람이 될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이후에 주님께서 반드시 높여주시며 영광으로 덧입혀주십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회의를 하는 분야의 경우입니다. 어떤 일꾼은 자기 의견에 따라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 합니다. 또 어떤 일꾼은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이 탐탁지 않게 느껴집니다. 반면에 어떤 일꾼은 다른 사람들이 의견을 낼 때마다 귀 기울여 듣고 자기에게 좋은 의견이 있더라도 되도록 상대의 의견에 따라주려 합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면 늘 나보다는 상대를 더 존중해 주게 됩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보다 자녀들을 먼저 생각하며 좋은 것으로 먹이며 좋은 옷을 입히려고 합니다. 이러한 자녀에 대한 사랑을 이웃에게 동일하게 베풀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잘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하시며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백성들을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히 자신의 자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가득해서 누릴 수 있는 것도 다 포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 영광을 다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기에 육적으로 보면 늘 고생만 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은 최고의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0:35 후반절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하신 말씀처럼 여러분 모두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 받기보다 주는 삶을, 어떤 유익되는 일이 있을 때 나부터가 아니라 내 이웃부터, 내 형제부터 생각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남의 유익을 구할 때 주님께서는 분명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충성하고 헌신한다고 자기는 조금도 돌보지 않으면 오히려 영광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먹지도 쉬지도 않고 무리하다가 오히려 몸이 상하면 안 됩니다. 물론 자신의 분량에 넘치도록 충성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 받으시지만, 온전해지기까지는 육을 위해 일용할 양식도 구하고 휴식도 취해야 합니다. 또 때로는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말씀을 무장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마음이 식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보다는 교회와 영혼들이, 이웃과 가족들이 우선순위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자신의 유익을 구하다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식을 한다고 회사 일에 지장을 주거나, 또는 충성한다고 항상 교회 일만 하고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는 일터나 가정에서의 본분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주의 일에 충성했어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다했다 할 수는 없으므로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성령을 의뢰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성령의 주관을 따라 행해나가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악을 벗고 마음에 참 사랑을 이루면 각 상황마다 선의 지혜가 풍성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져서 마음껏 충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출 것을 반듯하게 갖춤으로써 믿지 않는 이웃이나 가족들에게도 인정받고 사랑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늘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으로 늘 자신보다 주변을 먼저 살피심으로 풍성한 주의 사랑을 공급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상대가 피해를 주거나 어떤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곧잘 노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내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너무나 무익하고 해롭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반면에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만들며 상하게 하고 어둡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냄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원수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올무가 바로 미움과 성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내게 하는 마음의 감정들과 미움들을 신속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며 폭력을 쓴다든가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일그러진다든가 얼굴색이 변하는 것,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 등도 성내는 것에 속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에 있는 미움, 불편함 등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상대의 외모만 보고 화가 났구나.판단,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성내는 것 같아 보여도 성내는 것이 아닌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일이 있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예수님도 화를 내시나보다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미움 같은 감정 때문에 노하신 것이 아니라 의분을 내신 것입니다. 의분을 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불의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신 것이며, 이런 의분은 결국 공의로 사랑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다고 송사하려고 그 사람을 고치시나 엿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물으십니다. 잠잠하자 5절에"예수님께서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했습니다.
당시 악한 자들은 이처럼 선만 행하시는 예수님을 정죄하고 어찌하든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때때로 강한 표현으로 책망하십니다."저희 완악함을 근심하사"한 것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영혼들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어찌하든 그들이 깨우쳐 멸망에서 돌이키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때때로 의분을 내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노하심이 때때로 영혼들을 깨우고 생명으로 인도했습니다. 성결되어 죄가 없을 때 책망을 통해서도 영혼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반면에 마음이 온전히 성결되지 않으면 이런 선한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엘리사의 경우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아 많은 권능의 역사를 나타냈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아이들이 자신을 대머리라 놀리자 그만 노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아이들을 저주합니다. 그러자 그 저주가 임함으로 42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암콤에 찢겨 죽고 말았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이 이룬 큰 행적들과 상반되게 병으로 죽게 됩니다. 야고보서 1:20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한 말씀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령 훼방, 모독, 거역의 죄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1에"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와 권능의 종을 판단, 정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무조건 참고 잠잠한 것만이 선이 아닙니다. 만약 부모님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이웃이 악한 말로 부모를 욕하고 대적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다면 그 자녀를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절제를 잘해서 꾹 눌러 참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성내게 하는 감정들을 버려야 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마음에서 감정을 다 버리고 선과 사랑으로만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매일 꾸준히 노력해 나가야 합니다. 우선 화가 나는 상황이 찾아왔을 때 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낼 일을 만나면 시간을 갖고 성내는 것이 과연 무슨 유익을 주는가주의 깊게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한 순간 참지 못함으로 후회할 일이나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생기지 않으니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이렇게 참고 인내해 나가면 나중에는 성나게 하는 감정들까지 버려지고 상대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해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고 평온합니다.
잠언 12:16에"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했고, 잠언 19:11에는"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셔서, 더 나아가 노하는 마음 자체를 버리심으로 날마다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해나가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나는 일이 있어도 믿음의 형제들 앞에서는 잘 참지만, 반면에 가정이나 일터 등 세상에서는 곧 잘 혈기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서나 여러분을 지켜보시고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낡은 옷을 벗어 버리듯이 형제에게 성내는 사랑 없는 모습을 다 버리시고, 선과 사랑과 온유의 새 옷을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9-04-11 오후 1:57:24 Posted
2023-04-18 오후 4:30:5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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