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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차원

제목
공간과 차원(5)  [히11:1]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9.01.18
지난 시간에는 3차원의 공간에서 지킴받고 보호받은 사례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영의 세계에 속한 존재를 볼 수 있는 두 가지 경우에 대해 설명하고 4차원의 공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의 공간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1.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경우

1) 육의 공간에 사는 사람에게 영의 공간을 입힌 경우
이는 간단히 말해 영안이 열리는 경우입니다. 사람의 눈에 3차원의 공간이 입혀지면 영안이 열려 영의 세계에 속한 천군, 천사 등 영적인 존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엘리사가 밝은 계시로 번번이 아람의 전술을 알아내어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준 기록이 나옵니다.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으려고 그가 있는 성에 군사와 말과 병거를 보내 포위합니다. 이것을 알게 된 엘리사의 사환은 매우 걱정하며 두려워하지만, 열왕기하 6장 16절에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7절에 엘리사가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하늘의 군대를 보내어 위급한 상황에서도 지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기도를 통해 그의 사환도 순간 영안이 열려 하늘의 군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 느부갓네살 왕도 영안이 열리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의 아들과 같은 이가 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세 사람과 함께한 분은 성신 하나님이므로, 그곳은 4차원의 공간이 입혀졌습니다. 이처럼 영안이 열리면, 즉 3차원의 공간이 사람의 눈에 입혀지면 4차원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3차원의 존재를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3차원과 4차원은 빛의 밝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영안이 열린 분은 많지만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의 얼굴을 또렷이 본 분은 드뭅니다. 그 빛이 매우 밝아서 영안이 열려도 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장막을 치시는 등 빛을 조절해 주셔야만 어느 정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 영으로 이룬 분들이라면 영안이 열려 주님의 영을 평안히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신 대로,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다면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안을 열어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그에게 다니엘의 세 친구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신임을 깨우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니엘 3장 28-29절에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했습니다. 영안이 열린 느부갓네살 왕은 즉시 깨우치고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느부갓네살 왕에게만 영안을 열어 주셨을까요? 이는 왕 한 사람만 깨우치고 변화되어도 신하들은 저절로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안이 열리지 않았다 해도, 신하들이 왕의 말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습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서도 머리카락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나온 세 사람이 바로 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안이 열려 영의 세계를 보는 것도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이뤄짐을 잘 깨달을 수 있기 바랍니다.

2) 영적인 존재에게 육의 공간을 입힌 경우
첫 번째 경우와 반대로 하나님께서 영적인 존재에게 육의 공간을 입히면, 육안으로도 영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소돔성에 나타났던 두 천사가 그러한 경우입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롯이 두 천사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음식도 같이 먹었습니다. 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육을 입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소돔 백성들도 낯선 두 사람이 롯의 집에 들어간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천사에게 육의 공간을 입히셨으므로, 육의 사람들은 두 천사를 그냥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롯은 멸망이 임박함을 알자 너무도 당황하여 두 천사가 재촉하는데도 어찌할 바를 모르며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롯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육을 입은 두 천사가 직접 그의 손을 잡아끌어 그 곳에서 나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또 두 천사를 보내심으로, 그 곳이 정녕 멸망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육의 사람들이 얼마나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인 두 천사에게 육의 공간을 입히므로 육의 사람들에게도 보이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이 제단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일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합당한 공의 가운데 천사에게 육의 공간을 입히므로 성도 여러분이 볼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으로 육을 입은 천사를 보면 정녕 영의 세계가 있음을 온전히 믿고 미련 없이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2. 4차원의 공간

신년 기도 제목 중에 하나인 아버지 하나님의 권능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4차원의 공간은 근본의 하늘과 같은 넷째 하늘의 속성을 가진 공간입니다. 넷째 하늘에서는 무에서 유가 창조되며, 죽은 것이 살아나고, 마음먹은 대로 모두 이루어집니다. 고체가 액체로, 액체가 기체로, 기체가 고체로 자유자재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사에게 육의 공간을 입히는 것도, 다시 육의 공간을 벗기는 것도 4차원의 공간을 소유할 때라면 가능한 일입니다. 쉽게 말해, 4차원의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단, 그 일이 넷째 하늘의 공의에 맞아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4차원의 공간 특성 중에 창조의 역사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1) 창조의 역사
창조는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만드신 것, 이것이 바로 창조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차원의 공간인 넷째 하늘을 온전히 소유하셨기 때문에 이런 창조의 역사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베푸신 창조의 역사
4차원의 공간을 소유하신 예수님께서도 창조의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공생애 중 처음 나타내신 표적도 창조의 역사에 해당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혼인 잔칫집에 초대받아 가셨는데,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육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청을 순순히 받아 주지 않으셨지만, 마리아의 마음에는 여전히 믿음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마시고 취하게 하려는 것보다, 심히 난처한 입장이 된 잔칫집 주인을 돕기 위해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지만, 마리아는 그로 인해 마음이 상하거나 낙심치도 않았으며 예수님께 구한 것을 받은 줄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 하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온전한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하인들에게 먼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 하셨습니다. 하인들이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다 채우자,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라" 말씀으로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그 일을 마음에 품으시니, 여섯 개의 큰 항아리에 담긴 물이 순간에 맛좋은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4차원의 공간에서는 마음에 품기만 하여도 이 같은 창조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4차원의 공간을 소유하셨어도 아무 때나 이런 창조의 역사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공의에 맞을 때에만 이러한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고 믿고, 변함없이 믿음으로 구하며 순종했던 마리아의 온전한 믿음이 공의를 충족시키는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영적으로 인간 경작 6천 년과 예수님의 구속 사역 등 중요한 의미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처음 표적으로 이러한 창조의 역사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부분을 단편으로 설교한 자료와 저의 간증책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를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또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신 일이 각각 있었습니다. 이를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표적이라 하는데, 이것도 4차원 공간에서 이뤄진 창조의 역사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 때는 남자 어른 수만으로도 5천 명 이상이 먹었고, 남은 것을 거두자 열두 바구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칠병이어의 표적 때도 남자 어른 수만 4천 명이 먹었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두 사건 모두 여자와 아이들의 수까지 합하면 그 수는 엄청나게 많아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표적을 베푸실 수 있었던 합당한 공의는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5장 32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했습니다. 수천 명의 무리들이 오직 예수님을 사모함으로 사흘이나 붙좇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사모하고, 병자들이 고침 받는 것을 보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이 온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사랑이 더해지자, 창조의 역사를 베풀 수 있는 공의가 성립되었습니다.

2) 엘리야를 통해 나타난 창조의 역사
믿음의 선진들 중에서도 이와 유사한 창조의 역사를 베푼 경우들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행한 일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시돈에서 만난 사르밧 과부는 형편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육으로는 마지막 한계 상황이었습니다. 오랜 가뭄에 양식이 떨어져 마지막 먹을 양식,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남은 양식으로 먼저 자신이 먹을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축복의 말씀을 줍니다.
열왕기상 17장 14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르밧 과부는 어떤 이유나 변명도 없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사르밧 과부가 받은 축복은 열왕기상 17장 15-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가루 한 움큼과 조금 뿐이던 기름이 여러 날 먹어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계속 창조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증거입니다.

3) 4차원의 공간을 활용하여 창조의 역사를 나타내려면
창조의 역사는 4차원의 공간에서 일어나며,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4차원의 공간을 소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어떻게 4차원의 공간을 활용하여 창조의 역사를 베풀 수 있었을까요? 사실 엘리야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사도 바울 등도 4차원의 공간을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진들은 4차원의 공간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다만, 4차원의 공간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한정적으로 읽고 4차원의 공간을 전달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한정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어떤 일에 대해 그 순간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마음과 뜻을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이루는 그 일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할 수 있는 온 영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영의 공간을 함께 탈 수 있는 공의에 합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명하시면, 그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읽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느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의 공간에서 이루실 일이 마음에 그려지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불의 응답을 끌어내렸던 것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겠다는 느낌을 그 마음에 전달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지막 먹을 양식밖에 없는 사르밧 과부에게 담대히 양식을 청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습니다.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셨고, 엘리야는 순종해서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르밧에 가면 엘리야를 공궤할 한 과부를 만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과부를 금방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 과부의 현실이 어렵다 해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그 길도 훤히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 역시 축복받을 수 있는 공의에 합당한 믿음과 순종을 내보였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 선지자를 신뢰했고, 그 입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또한 어떠한 생각도 동원치 않고 아무런 주저함 없이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엘리야를 믿고 순종함으로, 사르밧 과부도 엘리야가 타고 있는 영의 공간을 함께 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역대하 20장 20절 후반에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했습니다. 4차원의 공간은 하나님만이 소유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 된 사람에게도 4차원의 공간을 입혀 주십니다. 4차원의 공간이 입혀진 하나님의 사람과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 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역시 4차원의 공간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를 잘 터득하여, 여러분도 4차원의 공간에서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도 계속하여 4차원의 공간에 나타나는 역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2009-01-19 오후 10:36:40 Posted
2018-06-25 오후 10:39:0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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