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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73) 새 예루살렘 [계 21:1-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4.28
최후의 대심판이 끝나면 성도들은 이제 천국의 자기 처소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심판 후에 들어갈 천국과 그중에서도 새 예루살렘을 보고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지요.

계 21:1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했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우리가 경작받은 육의 하늘과 땅을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셋째 하늘 곧 천국의 하늘과 땅을 말하지요.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이후에 있는 것이니 ‘둘째 하늘과 둘째 땅’ 혹은 ‘나중 하늘과 나중 땅’이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하신 것은 경작을 위해 만들어진 처음 하늘과 땅이 경작 후에는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했지요.

물론 필요가 없다 해서 이 육의 세상이 소멸된다는 뜻은 아니라 했습니다. 첫째 하늘 곧 육의 공간도 태초에 하나님의 근본의 공간에서 나뉜 공간이기에 아주 소멸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 해도 여전히 존재하며 단지 그 공간의 문을 닫아두실 뿐입니다.

그러면 새 하늘 곧 천국의 하늘은 어떤 하늘일까요?
히 8:5 전반 절에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것들 중에는 천국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지요. 이 땅의 하늘이 푸른 것도, 구름이 떠다니는 것도 천국의 하늘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실체와 그림자가 똑같지는 않은 것처럼 천국의 새 하늘은 훨씬 더 아름답지요.

이 세상의 하늘과 달리 전혀 오염되지 않은 참으로 맑고 깨끗한 푸른색입니다. 파란색은 깊이와 높이 그리고 맑음을 느끼게 합니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깨끗한 마음을 갖기 원하는 마음이 듭니다. ‘더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야겠다. 저 푸른 하늘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아야겠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지요.

만일 하늘 전체가 노란색 혹은 빨간색이라면 어땠을까요?
물론 노을이 질 때는 하늘의 붉은 빛을 보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감탄을 하기도 합니다. 천국에서도 성도들이 보고 싶어 한다면 이보다 훨씬 아름다운 노을빛을 하늘에 연출해 주실 수도 있지요.

하늘에는 희고 빛나는 구름도 떠 있어서 때로는 이 구름이 노을에 물든 것처럼 아름다운 장면도 펼쳐주십니다. 그러나 특별한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하늘이 붉거나 노란 빛이라면 사람들의 정서가 안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요. 또 하늘이 온통 잿빛 구름으로 덮였을 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부정적이게 됩니다. 공연히 우울해지기도 하구요. 반면에 오랜 장마가 끝나고 구름이 걷히면서 푸른 하늘이 드러나면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에 좋은 영향을 주는 푸른빛을 천국의 새 하늘에 펼쳐주셨습니다. 그 하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수정같이 맑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세세토록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지요. 천국의 하늘은 더더욱 맑고 푸른데 여기에는 해나 달, 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계 22:5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했지요.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새 예루살렘에서부터 낙원의 가장자리까지 환히 비춰줍니다. 굳이 해나 달 혹은 등불이 필요 없지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원래 너무나 밝지만 천국의 각 처소에 따라 밝기가 조절이 됩니다.

만약 새 예루살렘에 비춰주는 것과 같이 낙원에도 그 빛을 그대로 비춰준다면 낙원의 영혼들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도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고 고개도 들 수가 없지요. 하나님을 닮아 온전한 영으로 일구었을 때라야 곧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성도들이라야 그 빛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원에서는 낙원의 성도들에 맞게 적당한 밝기로 조절이 됩니다. 3천층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빛보다 그 밝기가 조금 감해지고, 2천층으로, 1천층으로, 낙원으로 갈수록 빛의 밝기가 더 감해지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항상 비추고 있기에 천국에는 어둠이 전혀 없고, 따라서 밤도 없습니다. 그러면 혹여 여러분 중에 ‘이 땅에서는 밤이 되면 잠을 자야 몸의 피로가 풀리고 쉼을 얻었는데 천국에 가면 어떻게 쉴 수 있을까? 주위가 온통 밝으면 어떻게 잠이 들 수 있을까?’ 하는 염려 아닌 염려를 하시는 분이 계신지요? 그런 염려는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무엇을 해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아무리 여기저기를 다녀도 피곤치 않으니 피곤을 풀기 위한 휴식도 필요가 없지요. 또 천국에서 입게 되는 온전한 영체는 이 육의 몸과는 달라서 피곤을 느끼는 몸이 아닙니다. 그리고 천국의 빛이 밝다고 해서 그 안에 사는 사람의 눈을 피곤케 하지는 않습니다. 그 빛으로 인해 오히려 더 충만하고 행복하며, 쉬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물론 새 예루살렘 안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밤하늘에 별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싶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일정한 공간에만 밤하늘과 같은 공간을 만들어 주시면 되지요.

다음으로 “새 땅” 곧 천국의 땅은 무엇으로 이뤄졌을까요? 이 땅은 바위와 돌, 흙으로 이뤄져 있지요. 천국의 땅의 재질은 금과 은 그리고 각종 보석들입니다.

천국의 땅 곳곳에는 포장된 도로처럼 정금으로 입혀진 길도 있고, 보석이 블록처럼 깔린 길도 있지요. 금모래, 은모래가 가득 펼쳐진 강가도 있구요. 그런데 천국의 땅에 깔린 금, 은이나 보석은 흙처럼 가루의 형태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구슬처럼 생겨서 바람이 불어도 먼지처럼 날리거나 몸에 묻어서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지요. 이 세상에서는 금이나 보석 속에다 식물을 심으면 살 수가 없지만 천국에서는 살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석이 썩지 않는 것처럼 보석의 토양에서 자란 식물도 썩지 않지요. 하나님께서 한번 심고 자라게 하신 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흙으로 이뤄진 이 세상의 땅은 인생의 허무함을 알게 해 줍니다. 흙에서 자라난 모든 식물도, 또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사는 짐승과 인생들도 결국은 죽어서 부패되어 흙으로 돌아가지요. 이런 것만 보고도 우리는 육의 세상의 허무함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썩어지고 변질되는 헛된 것을 취하지 말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계 21:2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흠과 티가 없으며 진실하고 참된 것이요 영화롭고 빛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보고 있는 성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빛으로 만들어진 성이기에 거룩한 성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 거룩한 성 안에는 어둠이나 거짓된 것, 가증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이 성에 하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지요.

이 땅의 예루살렘은 율법을 토대로 이뤄진 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였지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므로 예루살렘에 복음의 씨앗이 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 안에 복음이 심기고 복음으로 이뤄진 모든 일들을 기념하여 거룩한 성의 이름을 새 예루살렘이라 지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예언하시기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은 서기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함락되고 하나님의 성전도 완전히 훼파되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예언은 단지 이런 역사적인 사실만이 아니라 영적인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곧 구약의 모든 율법이 주님의 사랑으로 완성될 것을 의미하지요. 물론 예루살렘이 무너졌다 해서 구약 시대 하나님의 율법이 다 무효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는 산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는데 신약에서는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의 절차 안에는 구약 시대 제사법에 담긴 영적인 의미들이 그대로 담겨 있지요. 주님께서 율법을 온전히 이루시므로 세워진 새 예루살렘에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주님, 성령님 그리고 그 말씀대로 온전히 이룬 사람들이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이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 했지요. 이는 실제로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근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친히 예비하신 성이지요. 성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정성껏 예비되었는지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보통 성경에 나오는 신랑과 신부의 비유는 우리 주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 땅에서의 경작의 세월 동안은 장차 신랑 되신 주님을 맞기 위해 성도들이 열심히 신부 단장을 하지요. 그런데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신랑이고, 새 예루살렘 성이 신부입니다. 육의 세상에서도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는 얼마나 정성스럽게 단장을 합니까?

몇 주 혹은 몇 달씩 걸려서 자신을 가꾸고 신랑이 가장 좋아하는 모습대로 그의 마음에 쏙 들게 준비하지요. 이런 것처럼 새 예루살렘은 그곳에 거하는 성도들의 마음에 꼭 맞게 단장되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흠 없이 단장한 주님의 신부들이지요.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신랑 되신 주님의 마음에 꼭 맞도록 온전히 말씀대로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아버지와 주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드린 사람들이지요.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그들의 마음에 꼭 맞는 처소를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단장한 신부와 같은 새 예루살렘의 처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합당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지요. 철저한 공의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계 21:3-4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넷째 하늘 곧 근본의 하늘에 거하시지만 심판 후에는 새 예루살렘에도 거처를 두십니다. 새 예루살렘의 성도들과 함께 거하시면서 성도들의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시지요. 이는 단지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근본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사망이나 애통이 없고 곡하는 것도 없고 질병이나 재앙으로 아픈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경작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고, 이제 참 자녀들을 얻으셨으니 더 이상 사망이나 아픔을 허락하실 이유가 없지요.

5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언급할 때는 보통 심판주로서의 권세를 나타내실 때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점은 심판이 끝난 때이니 심판주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지요. 보좌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印)치시는 것처럼 말씀을 확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왕의 어인이 찍힌 문서는 변개치 못하는 것처럼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신실하며 참된 것인지를 강조하지요. 이제 썩어지고 변질되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만물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본문 6절에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하신 것은 인류 대속의 사업을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었도다” 하신 것은 경작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참 자녀를 얻으시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이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기까지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뜻이지요.

본문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은 계 1:8에서 설명한 대로 문명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뜻입니다. 또 “처음과 나중”이란 구원의 섭리에 대한 말씀이지요. 우리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재림하시므로 구속 사업을 마무리 하십니다.

그래서 원래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구원의 처음이요 나중이 되시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을 처음과 나중이라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모든 구원의 섭리를 주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지요.

이어지는 본문 6절 후반 절에는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하셨습니다.

물은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영적으로도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지요.
요 4:14에도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생명이 없고 항상 갈급하며 허전함을 느낍니다.
헛된 것, 세상 것을 늘 취하려고만 하고 아무리 재물을 모으고 쌓아도 불안하지요. 교회를 다닌다 해도 진리를 지식적으로만 알고 참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채워나가지 않으면 세상 사람과 똑같이 늘 목마르지요. 참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는 사람은 진리로 마음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안에 있던 비진리를 벗어내고 진리로 채우는 사람이라야 영적인 갈급함을 해소할 수가 있지요.

사람의 힘으로는 성결될 수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 속에서 능히 진리로 채워나갈 수가 있습니다. 진리로 채우는 만큼 목마름은 사라지고 마음속에 참 기쁨과 평안과 만족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천국에 들어가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와 상급을 유업으로 받고, 하나님의 참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신 말씀대로이지요.

그런데 왜 여기서 “나는 저의 아버지가 된다” 하지 않으시고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셨을까요?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고 표현하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질 텐데 말입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며 주관하심을 다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그 말씀을 온전히 이루고 세상을 이기는 자는 이런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축복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시는 것이지요.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에서는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심으로 사망도 애통도 아픔도 없다 했습니다. 질병 하나만 없다 해도 얼마나 행복한 세상이겠습니까? 자신이 질병으로 고통 받지 않는다 해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에 시달릴 때 마음이 너무도 상하기 마련이지요.

한 예를 들어 피부병을 앓는 자녀가 밤 새 몸을 긁고 피고름을 흘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애가 닳아서 눈물이 마를 정도입니다. 이 질병 하나만 없어도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쉼을 얻고 행복하겠습니까? 물론 이 땅에서 질병 고통이 있다 해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으니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또 세상에는 각종 시험 환란이 있다 해도 말씀대로 사는 우리 성도들은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니 겁날 것도 없고 혹 연단이 온다 해도 능히 이길 때 이를 통해 더 큰 축복을 받으니 감사하지요.

그러나 그런 아픔들이 전혀 없는 천국은 얼마나 더 행복하겠는지요? 더구나 여러분이 사모하는 새 예루살렘은 신부와 같이 단장을 했다 했습니다. 슬픔이 없을 뿐 아니라 최고의 행복과 즐거움을 영원히 누릴 수 있도록 가장 좋은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천국이 상상을 초월하는 신비의 나라라 하십니다. 직접 가서 보면 그 신비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지요. 물론 여러분은 영계에 대해 깊은 것도 배우고 천국 설교를 자세히 들어서 잘 아시지요. 그러나 아무리 자세히 듣고 알아도 그 행복과 기쁨을 얼마나 알겠습니까?

막상 그곳에 발을 딛고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천국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말문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천국은 반드시 공의에 따라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사모한다고 외친다 해도 그냥 적당히 신앙생활 해서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아니지요.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신부 단장을 마친 사람들이라야 신부와 같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러분은 철야하고 또 날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지요.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반드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을 신속하게 갖추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미 수많은 영적인 말씀들을 들었으니 자신을 진리로 낱낱이 해부하고 발견하여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고전 15:31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고백처럼 정녕 날마다 죽어짐으로 영원한 영광을 얻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4-27 오전 11:29:39 Posted
2023-06-04 오전 11:32:3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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