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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제목
위로부터 난 지혜 (4)  [약 3:17]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6.08.02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관용에서 오는 ‘진리의 자유함’과 ‘명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관용에서 나오는 지혜

1) 진리의 자유함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습니다. 진리 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족쇄처럼 여겨지지만, 진리를 알고 온전히 행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죄를 짓고 도망치는 사람은 경찰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만,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경찰이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고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니 오히려 가까이 있는 것이 더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진리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이 그의 사랑이며 축복의 통로임을 알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온전히 지킬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이 부담스럽게 들립니다. 안식일에는 장사하지 말라거나, 세상 오락을 취하지 말라는 것 등이 모두 족쇄처럼 여겨지지요. 그러나 마음 중심에서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이런 말씀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해 드림으로, 자신이 받는 평안과 축복을 알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형통케 하시므로 한 주간 재앙이나 사고 없이 지킴을 받을 수 있고, 안식일에 장사를 쉰다고 해서 무조건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익을 얻게 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6일 만에 7일 동안의 수입 이상을 벌게 하실 수도 있고, 불필요하게 새어나갈 지출을 막아주실 수도 있습니다. 질병과 사고가 없게 하시므로, 병원비나 약값도 들지 않고 사고로 인해 물질이 새어나갈 일도 없게 됩니다. 이처럼 안식일을 지키라는 진리를 알고 행하면,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아 행복하고 평안하니 자신의 삶이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미움을 버리면 마음이 가볍고 행복해집니다. 예전에는 미움으로 인해 싸움이 있으니, 하나님 앞에서도 민망하여 마음이 무거웠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미움이라는 죄성을 버리고 나면, ‘이렇게 좋은데 왜 진작 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행복하게 됩니다. 진리가 죄의 멍에에서 풀어주고 죄의 짐에서 자유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진리가 마음에 가득하면 상대에 대해서도 자유함을 줄 수 있습니다. 상대가 진리대로 살지 않는다 해서 내 생각에 맞춰 정죄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대로 살아갈 수 있게 힘을 줄 수 있지요. 그런데 마음에 진리가 가득하다는 것은 진리가 무엇인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 후반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했습니다. 머리로만 진리를 아는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라는 동물은 마치 기둥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을 알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자긍하고 교만하게 되지요.
이런 사람은 상대가 섬김받길 원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일 때, 이내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됩니다. ‘저 사람은 참 마음이 높구나’ 하면서 정작 자신이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지요. 반면에, 마음에 진리가 임해 있는 사람은 상대를 그의 믿음의 분량에 맞추어 바라봅니다. 말씀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지만, 상대의 비진리를 사랑으로 품어주고 허물을 덮어줄 수 있지요. 자신에게도 수많은 허물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처럼 상대를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2) 명철
진리가 풍성히 임하고 진리의 자유함 속에 넉넉한 마음이 되면, 범사에 밝은 길을 볼 수 있는 ‘명철’이 임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자유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깨닫기 쉽게 설명하며 영육 간에 상하고 찢긴 영혼들을 고치셨지요.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 대한 사건이 나옵니다. 어느 날,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할지 말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돌로 치라.” 하시면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사랑이 없다.” 할 것입니다. 반면에 “용서하라.” 하면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정죄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 없이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답변을 재촉하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땅에 쓰는 것을 계속하셨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하나하나 써내려 가는 것을 보면서, 차마 돌을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바닥에 쓰인 내용은 바로 그들에게 해당하는 죄목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하나 그 자리를 떠나고, 결국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됩니다. 당시의 상황은 요한복음 8장 10-11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여기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수치와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다가 극적으로 생명을 건진 여인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진리의 마음을 가지셨기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밝히 알아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죄인들의 마음을 이해하며 기꺼이 긍휼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관용의 마음도 있었기에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 하시며 하나님의 참뜻을 깨우칠 수 있는 지혜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진리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다면, 정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러한 답을 하실 수 없습니다.
만약 여인이 불쌍하다 해서 무조건 “살려주라.” 하셨다면 ‘율법을 거역하도록 가르친다.’는 정죄를 받아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고, 율법의 근본 취지를 아셨기에 모든 사람을 살리는 지혜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죄인에게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켜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불쌍하다고 용서만 해주면, 그 죄가 누룩처럼 전체에 퍼져 더 많은 사람이 멸망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형벌을 정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할 지혜는 예수님께서 군중들의 잘못을 말로 판단하지 않고 바닥에 쓰셨다는 데 있습니다. 군중들에게 직접 말하여 정죄하고 그들의 마음에 찔림이 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바닥에 써진 자신의 죄목을 보고 스스로 깨달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허물을 말하면, 이를 듣는 사람도 즉시 상대방을 무안 줄 때가 있습니다. “너도 이러이러한 잘못이 있지 않으냐?” 하고 말문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너나 잘해라.” 하는 것이지요. 물론 남의 허물을 말한 사람도 잘못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잘못을 한다고 해서,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 면박을 주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이고, 자신도 똑같이 판단하는 죄를 짓는 것이지요. 또한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은 비록 자신이 잘못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오히려 감정과 서운함을 품게 됩니다.
진리를 마음에 이루지 못하고 머리에만 지식으로 쌓으면, 그 지식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누군가 질병이나 연단을 겪는 것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 돌아봐라.” 하는 말로 상대를 정죄하는 경우도 있지요. 특히 가까운 사람이나 가족들에게 더 쉽게 그런 말을 합니다. 상대가 선한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어도 사랑의 권면으로 받고 돌이킬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고통 받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욥이 연단을 받을 때 친구들에게 반발한 것처럼, 오히려 감정과 서운함이 나올 뿐입니다. ‘나는 분명히 상대를 위해 좋은 말을 해줬는데, 상대는 왜 나를 불편하게 여기는가?’ 이런 고민을 하는 분이 있다면, 이런 경우는 아닌지 깨달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에만 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이루어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상대를 넉넉히 품어줄 수 있고, 상대의 마음에 있는 어둠도 물리쳐 줄 수 있습니다. 관용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비록 상대가 악으로 행한다 해도, 판단 정죄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소중한 한 영혼으로 여기고 진리로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이룰 때, 상대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정한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관용으로부터 얻어지는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한 작은 아들이 거지 행색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바로 관용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이때 열심히 일하다가 돌아온 큰아들은 이 잔치를 보고 심히 서운해하며 분을 냅니다. 성실히 일한 자신을 위해서는 그런 적이 없는데 방탕한 동생을 위해 잔치가 벌어지니 감정이 상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동생을 기뻐하시는 것을 보니 나보다 더 동생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닌가? 내 유산과 내 위치를 동생에게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 막연하게 이런 생각들이 동원되지요.
그동안 열심히 아버지를 도왔다고는 하지만 정작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도 확신하지 못한 것이지요. 아버지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있었다면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버지의 입장에서 동생을 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봐 불안해하거나 자기 몫을 챙겨야겠다는 마음이 아니지요. 아버지의 것이 곧 내 것이라는 마음이요, 아버지의 기쁨이 곧 내 기쁨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큰아들이 동생을 환영해 주었다면 아버지가 얼마나 든든했을까요. “과연 내 가업을 이어받을 장자답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하고 심히 사랑하며 기뻤겠지요. 작은아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열어 주었지만, 큰아들에게는 가업을 다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가 마음에 가득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고 풍성하게 됩니다. 내 것을 나눠주는 일이 아깝지 않고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더 잘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고 더 많이 누리도록 내 것까지 내어줄 수 있지요.
성도님들도 마음에 진리를 가득 채우시므로 풍성하고 넉넉한 관용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얼마든지 내어주고 또 내어줄 수 있는 평강과 기쁨이 여러분 안에 임하게 됩니다. 눈앞의 작은 유익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큰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지요. 그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고 섬기는 자, 낮아지는 자가 큰 자가 된다는 지혜를 체험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6-07-29 오후 7:32:03 Posted
2026-08-07 오후 3:30:3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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