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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제목
2차 영혼육 (9)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 [고후 10:3-6]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등록일
2021.12.26
오늘은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에 대해, 또한 영혼육으로 지음받은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 “나는 누구인가” 또한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들을 궁구하며 철학적인 여러 가지 이론을 만들어 왔습니다. 또 “사후 세계”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며 여러 상상과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신 대로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한다 해도 이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먼저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정할 때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답을 들을 때라야 이런 내용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육의 말씀은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에 대해 구체적이고 명확한 답을 주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여러분은 사람의 혼에 대해 배웠습니다. 혼이란, “사람의 두뇌에 있는 기억장치”와 “그 안에 저장된 기억 내용들” 그리고 “이 내용들을 재생하고 활용하는 생각”을 다 포함하여 총칭하는 용어라 했습니다. 또 우리가 모든 혼의 작용들을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진리로 해야 한다 했지요.
다음은 영에 대해 배울 차례인데, 그보다 앞서 참고적으로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람과 짐승의 차이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하등한 생물부터 시작해서 기능과 구조가 복잡한 고등생물로 진화가 되었고, 결국 사람으로 진화되어 나왔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영혼육에 대해 알게 되면, 이런 설명은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람과 짐승은 근본적으로 시작이 다르며, 구성 또한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혼육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입니다. 사람의 영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육은 사람의 영과 혼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고, 장막 집과 같습니다. 육이 썩어져 없어진다 해도 영은 소멸되지 않으며, 혼도 영과 결합되어서 그대로 남게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짐승들을 만드실 때에 사람처럼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이 아니므로 짐승에게는 영이 없고, 혼과 육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기나 새, 육지에 사는 짐승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머리 속에 뇌가 있고, 태어나서부터 그 안에 입력시킨 지식들과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살아갑니다. 결국 죽어서 육이 썩으면 혼도 소멸됩니다. 곧 뇌세포가 썩어 없어지므로 그 안에 담겼던 기억들도 소멸되고 더 이상 혼의 작용도 일어나지 않으며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전도서 3장 21절에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하여 사람과 짐승의 차이를 분명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기르던 짐승이 죽으면 너무나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을 봅니다. 사실, 죽은 짐승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의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더 많지요.
가령, 농촌에서 밭을 가는 소의 입장에서 볼 때 죽고 나면 더 이상 매 맞지 않아도 되고 고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재산에 큰 손실을 입게 되므로 슬퍼하는 것이지요. 애완용 개나 고양이도 죽으면 그들 편에서는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없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정을 주고 사랑하던 존재가 없어지므로 허전하고 서운하니 슬퍼하는 것이고, 또 자기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짐승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 불쌍히 여깁니다.
물론 짐승들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고 두려움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혼의 작용을 하기 때문에 주인이 애정을 쏟아 주면 이를 기억하고 주인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보여 주기도 하고 즐거움이나 분노나 슬픔을 표현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짐승이 하는 혼의 작용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짐승은 태어나면 본능에 따라 생존하는 법을 배우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때가 되면 번식하고 그러다가 죽습니다. 본능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혼의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거나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서 신을 경외하거나 종교를 찾는 경우도 없지요.
물론 짐승도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있습니다. 누군가 자기를 죽이려 하면 도망가기도 하고 위험을 느끼면 저항하거나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위험을 느끼는 순간에만 두려워하는 것이고 눈앞에서 위험이 사라지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금세 사라집니다.
그런데 사람은 짐승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더 복잡하고 다양한 혼의 작용을 합니다. 단지 먹고 사는 것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문명을 발달시킬 수도 있고,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고민하므로 철학과 종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에 대한 반응도 짐승과는 다릅니다. 죽음의 고통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자체를 두려워하며, 사후 세계에 대해 더욱 큰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 아닌데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어찌하든 피해 보려고 하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몸이 안 좋아서 검사를 받았는데 뜻밖에 암 말기로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입원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전까지 정상처럼 살아가던 사람이 하루 이틀 사이에 초췌해지고 병자의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내가 죽는구나’ 하는 절망감과 두려움 때문이지요.

사람이 이처럼 짐승보다 뛰어난 혼의 작용을 할 수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혼과 육뿐만 아니라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 속에서 영적인 세계에 대해 느끼며, 주를 믿는 사람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도 깊은 마음속에서는 신에 대해, 천국과 지옥에 대해 느끼는 것이지요.
과거에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양심이 선한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하늘을 섬기며 선하게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또한 머리로 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천국 지옥이 어디 있느냐, 죽으면 그만이지’ 하고 고집 부리는 사람들도 본성 속에서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만약 그런 두려움이 없다면 사람들은 죽음을 오히려 환영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온갖 고통 속에 구차하게 살고 있다면 차라리 죽어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입으로는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막상 죽을 상황이 되면 어찌하든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물론 너무나 절망스러운 상황에 자포자기하거나 마음과 생각을 악한 영에게 뺏겨 버리는 경우에는 그런 두려움조차 잊어버리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경우라면, 아무리 신을 부인하는 사람이라 해도 죽음에 직면할 때 본성 속의 두려움으로 고통받으며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하지요.

한 예로,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유명한 무신론자로서 50년 내에 기독교를 말살시키겠다고 장담하며 많은 무신론 책자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러던 그가 임종할 때가 되자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나는 두려운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했다고 하지요. 머리로는 하나님과 천국, 지옥을 부정한다 해도 임종이 가까우니 어떤 것이 참인지를 본성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 기독교를 말살시키려고 글을 써 온 볼테르의 집은 그가 죽은 지 20년 후에 성서를 출판하는 출판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외국어 성경까지 출판하는 본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부인하거나 대적하는 것과 상관없이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며 오늘날까지 전 세계로 전파되고 있는 것이지요.


2. 영이 주인이 되어 혼과 육을 다스릴 수 있어야

때때로 사람들은 짐승이 원한을 품고 죽으면 그 혼이 사람에게 복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짐승은 육의 죽음과 함께 혼도 소멸되기 때문에 누구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난다 해도 혼과 육으로 된 짐승이 진화되어 영을 가진 존재로 변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영을 주셨고, 그래서 아담은 모든 것을 다스리며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의 영혼육은 아담이 처음 지음받은 당시의 영혼육과 같지 않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영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 혼과 육을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영이 죽고 말았는데, 이는 영이 소멸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영이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어 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고, 세월이 지나 수명이 다하면 영혼이 지옥에 가게 되므로 영적인 죽음을 당한다는 뜻이지요.
아담의 범죄 이후 영이 죽어서 혼과 육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이제는 혼이 사람의 주인 노릇을 하며 육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혼이 주인이 되자,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사람은 점점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진리 가운데 거하며 혼과 육을 진리로 이끌어 갔지만, 혼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이고 정욕적인 것들을 추구해 나갔기 때문입니다(전 3:18). 이렇게 혼과 육으로 만들어진 짐승 같은 인생들은 그 영이 소멸되지 않으므로 결국 영원한 지옥에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가려면, 반드시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되찾아야 하는데 곧 영이 주인이 되어 혼과 육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위를 회복할 수 있고, 이 땅의 삶이 끝나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세상의 부귀와 명예, 권세를 한 몸에 얻는다 해도 정작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그 삶은 너무나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됩니다(눅 9:25). 차라리 짐승들처럼 소멸되기라도 하면 낫겠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참혹한 불지옥에서 세세토록 고통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잠시 잠깐 살아갈 이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원한 내세에 소망을 두고 남은 시간을 더욱 값지게 보내야 할 것입니다. 신속하게 죄를 버리고 온전히 성결되어 장차 신랑 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거룩하신 주님의 신부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12-29 오전 9:50:33 Posted
2021-12-31 오전 10:47:1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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