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홍수 심판 시 온 땅을 뒤덮었던 물은 점점 줄어들어 수위(水位)가 내려갔습니다. 노아 600세 되던 해, 10월 1일에는 산들의 산봉우리가 보일 정도가 됐지요.
노아는 그날로부터 40일이 더 지난 후, 물이 감한 정도를 알기 위해 새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까마귀 한 마리를 내보냈지요. 그런데 그 까마귀는 땅 위에 물이 마를 때까지 이리저리 날아다녔습니다. 까마귀는 노아에게 결과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노아는 이번에는 비둘기 한 마리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 비둘기는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배로 돌아왔지요. 노아는 손을 내밀어 비둘기가 내려앉게 해서 방주 안으로 들어오게 했고요. 이로써 노아는 아직도 땅 위에 물이 다 빠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7일 후,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그 날 저녁 무렵에 돌아왔는데 부리에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있었지요. 감람나무에서 새 잎사귀가 날 정도면 물이 거의 다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노아는 또 7일이 지나자 비둘기를 다시 날려 보냈는데 이번에는 비둘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새해를 맞았습니다. 601세 되던 해 1월 1일이 되어 방주 뚜껑을 제치고 주위를 살펴보니 물이 모두 빠져 있었지요. 그럼에도 방주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2월 27일이 되자, 땅이 말랐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 말씀하셨습니다.
1. 노아가 수위(水位)를 알기 위해 새를 날려 보낸 일이 주는 교훈
첫째, 믿음에는 행함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이 감한 정도를 다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그때그때 알려 주신 것이 아니었지요. 노아가 스스로 새를 통해 물이 감한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주관 받지요. 사람 편에서 행할 바는 전혀 행치 않거나 마땅히 좇아야할 도리는 좇지 않으면서 “믿습니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은 ‘참마음’을 이룬 사람에게 위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참마음’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 사랑, 진리로 채워진 마음입니다. 공의를 어기면서 무턱대고 자기 유익만 구하지 않지요.
선한 마음, 참마음을 이룬 사람은 내가 하나를 응답받기 위해서 공의에 맞게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그에 맞게 할 바는 행하며, 심을 것은 심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이처럼 참마음을 이룬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참마음을 가진 자녀들에게 위로부터 ‘온전한 믿음’을 내려 주셔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원하시지요.
그런데 만일 성도들이 참마음을 이루지 못했는데도 “믿습니다.”만 하면 모든 것이 응답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마치 자녀가 마땅히 자기 할 바를 행치 않는데도 부모가 모든 것을 들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학교에서 숙제를 받아왔습니다. 숙제하기 싫고, 놀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대신 숙제를 해 주고, 학교도 대신 가줍니까? 자녀가 아무리 힘들어 해도 이런 것을 대신해 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는 마땅히 자기 할 바를 스스로 해야지 지식도 쌓이고, 실력도 늘지요. 사회에서 어엿하게 한 몫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부모님은 자녀를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숙제를 할 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힘을 북돋우어 줄 수도 있지요. 이처럼 자녀가 숙제할 때 도와주는 것과 아예 대신해 주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하나님도 믿음의 자녀들이 어려움을 만나거나 시험을 당할 때에 구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아예 어려움도, 시험도, 연단도 오지 않게 다 막으시는 것은 아니지요.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도 느끼는 것이고, 연단을 통해서 참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대홍수 심판이 마무리되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이제 인간 경작이 새롭게 시작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간 경작이 시작될 때에 노아가 스스로 ‘행함’을 보일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노아는 그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행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홍수 전에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상황 속에서 그냥 말씀에 순종하는 차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만드는 것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일이 알려 주셨지요. 이렇게 다 알려 주시면서 이끄셨습니다. 짐승들을 방주에 태우는 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셨지요.
그런데 이제부터는 노아가 각 상황에 맞게 스스로가 행할 바를 주관 받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놀라운 믿음의 역사들은 하나님께서 이뤄 주신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반드시 선진들의 믿음의 행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범람하는 요단강의 흐름이 멈추도록 먼저 해 주셨나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바닥이 드러난 것을 확인하고 발을 들여놓았나요? 출애굽 초기 홍해를 건널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믿음이 어렸기에 홍해를 가른 뒤에 들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받은 출애굽 2세는 다릅니다. 그만큼 믿음이 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범람하는 요단강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발을 내딛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다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할 바를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얼마든지 단번에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믿음의 행함을 내보이도록 하셨지요. 바로 성 주위를 6일 동안 한 바퀴씩 돌고, 7일째는 일곱 바퀴를 돌고 난 후 외치라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했고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졌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더해졌겠는지요. 이후에 들어갈 가나안 땅도 우리는 말씀대로 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강한 믿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권능을 베푸실 때에 상대가 최소한의 믿음을 내보이도록 이끄시는 경우를 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이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하실 때에도 그러셨지요. 믿음을 갖도록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 주시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냥 말씀만으로는 소경의 눈을 고치실 수가 없기 때문일까요? 실로암 못에 눈을 뜨게 하는 특효 성분이 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소경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는 행함을 내보이도록 그 길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 있고, 영생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할 때에, 또는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순종할 때에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받아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자라며, 믿음의 결국인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도님들도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예전만큼 응답이 척척 오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원인이 물론 죄의 담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돌아보아 죄의 담이 없다면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함이 더해졌는지를 보시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갓난아이를 키울 때에 혼자 걷지 못할 때는 안아 주고 업어 줍니다. 그러나 아이가 이제 혼자 걸어야 할 때는 자꾸 넘어져서 아파하고 운다 해도 무조건 안아 주지는 않습니다. 우는 것이 안쓰러워 늘 부모가 안아만 준다면 그 아이는 영영 혼자 걷지 못하는 아이가 될 것입니다.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우리를 키우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연단을 받는 중에 마치 혼자 있는 것 같다 느껴질 때면 이 말씀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깊은 사랑을 깨우침으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대홍수 이후로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더 쉽지 않게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대홍수 전까지는 아버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많은 것을 듣고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홍수가 시작된 후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근본의 빛이 대홍수가 시작되면서 이 땅에서 완전히 거두어지자 이 땅에는 육의 기운이 더 왕성해졌습니다.
천지창조 첫째 날,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을 때 근본의 빛이 이 땅을 둘렀다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쫓겨 왔을 때부터 근본의 빛은 거둬지기 시작했지요.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도 그때부터 근본의 빛이 거둬지는 만큼 육의 근본 속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하려면 불같이 기도해서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어 보십시오. 마음이 온유해지며, 미움이나 시기, 질투도 눈 녹듯이 사라져 오히려 상대가 사랑스러워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같이 기도하지 않으면 원수 마귀 사단의 미혹을 받아 죄를 짓고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근본의 빛이 거둬지는 만큼 죄로 물들어서 육의 속성이 드러났다 해도 근본의 빛의 강도가 더 강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에 지장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홍수 후에는 근본의 빛이 남김없이 거둬짐으로 인해 육의 근본 속성이 더 왕성해진 것입니다.
여러분도 성령의 감동함과 충만함을 잃어 가면 그만큼 은혜도, 믿음도 떨어져 세상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들이 틈타 세상 것이 들어오게 되지요. 그러니 우리 주님께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홍수 후 육의 근본의 속성이 더 왕성해짐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이전과는 다른 더 많은 노력과 행함이 있어야 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쉽게 교통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그만큼 힘쓰고 애써야 영계를 뚫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물며 죄악으로 더욱 관영해진 이 마지막 때에는 어떻겠습니까. 영계를 뚫고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기도와 금식을 쌓아야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구약 시대와 달리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들 마음에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항상 쉬지 말고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밝히 받아 영적으로 캄캄한 이 세상에서 항상 밝은 빛으로 인도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노아가 새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낸 목적
노아는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할 때, 까마귀와 비둘기를 택했습니다. 본문 창세기 8장 7절에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했습니다. 까마귀는 이처럼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음에도 끝내 노아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까마귀는 노아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노아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온 새는 까마귀가 아니라 비둘기였습니다.
노아가 새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낸 목적은 무엇입니까? ‘물이 빠지고 땅이 말라서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얻는 것입니다. 까마귀는 그 소식을 가져오지 않았으나 비둘기는 노아가 원하는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노아는 까마귀가 아닌 비둘기를 통해서 방주 밖의 세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까마귀’와 같은 일꾼인가요? ‘비둘기’와 같은 일꾼인가요? 조직의 질서 가운데 어떤 일을 지시받았을 때에 나는 어떻게 했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지시받은 대로만 해내는 사람이었는가, 지시받은 것도 안 하는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지시받은 것 이상으로 해내는 사람이었는가. 이 세 부류 중 윗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주는 사람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지시받은 것 이상으로 해내는 사람이지요. 이것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어느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 인정받고 성공하려면 자신이 맡은 역할 이상을 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이 힘들다고 하는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자신이 맡은 역할조차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능력이 부족하면 부단히 노력해서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여기에 마음 그릇을 넓혀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명한 것을 그대로 순종함은 물론 그 이상을 이뤄내는 자녀를 보실 때에 감동을 받으시고 사랑의 표현을 해 주시지요. 잠언 25장 13절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린다면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지요. 그런데 까마귀와 비둘기의 행함이 달랐던 데는 마음 그릇의 차이, 토질의 차이도 있었습니다. 한 종류의 씨앗이라도 어떤 토질에 심느냐에 따라 열매의 맛이나 성질이 다른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고구마도 어떤 토질에 심느냐에 따라서 밤고구마나 물고구마가 됩니다. 즉 밤고구마를 캐려면 척박한 땅의 토질에, 물고구마를 캐려면 옥토 같은 땅에 심어야 하지요.
이처럼 동일한 ‘말씀’의 씨앗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떨어져도 각 사람의 마음 밭에 따라 반응이 다릅니다. 심은 대로 딱 그만큼만 열매를 내는가 하면 평균 이하의 열매를 내기도 하고, 반대로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각 사람의 마음 밭의 상태에 따라서, 또한 동일한 마음 밭이라도 그 크기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님들은 마음 밭을 옥토로 부지런히 개간하는 동시에 자기적인 의와 틀을 깨뜨려서 마음 그릇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아버지 하나님 마음에 맞게 딱딱 맞춰드린다면 얼마나 그 마음이 시원하시겠는지요? 더 나아가 그 이상도 이뤄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감동을 받으시고 “내가 무엇을 줄꼬?” 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자와 같은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6-07-16 오후 2:39:39 Posted
2026-07-31 오전 11:24:33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