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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분량

제목
믿음의 분량(10) 믿음의 3단계 [롬12: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12.18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믿음의 3단계 세 번째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1. 지속적인 믿음의 성장을 하려면 마음의 죄성을 발견해 버려야

믿음의 1단계는 구원받고 성령 받은 믿음이요, 2단계는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히 행할 수 있는 힘이 없으므로 때로는 말씀을 지켜 행하기도 하며, 때로는 말씀을 어기고 범죄하기도 하지요.
믿음의 3단계에 이르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고 믿어지기 때문에 능히 말씀대로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겁다." "신앙생활이 힘들다."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 행복하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3단계를 넘어서 믿음의 4단계로 들어가면, 바로 그토록 여러분이 사모하시는 영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믿음의 단계들을 신속하게 뚫어서 영의 단계까지 순조롭게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믿음의 1단계에서 2단계, 2단계에서 3단계까지는 금방 들어왔는데, 3단계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지체하는 것입니다. 즉 4단계로 들어가려면 마음의 죄성 자체를 버려서 성결되어야 하는데, 마음의 죄성을 버리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미워하지 말라",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기 때문에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이해하며 품어 주려고는 하지만 마음에는 아직 미움이라는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지만 마음에서 불평이나 원망의 뿌리가 아주 뽑혀 없어진 것은 아니지요. 이럴 때 자기 안에 죄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게으름이나 우유부단한 성품으로 인해 결단력 있게 벗어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경우는 자신의 마음에 죄성이 남아 있는 것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죄를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어떤 죄와 악이 있는지를 발견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발견하지 못하면 죄성들을 가진 상태로 머물러서 더 전진해 나가지를 못합니다. 믿음의 청년기와 같은 3단계에 들어섰으면 속히 장성하여 4단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믿음이 정체되어 버리면 문제가 생기지요. 스스로도 성령의 충만함이 떨어지고 뭔가 답답하고 곤고함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볼 때는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말씀의 권세나 능력이 따르지도 않으니 실망하고 스스로 고통을 받기도 하지요.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여 영으로 들어갔다면, 그 마음에는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이 떠나지 않고 성령의 음성과 인도를 정확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삶의 모든 분야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증거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발견해서 벗어 버려야 하는 악의 모양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믿음의 정체 없이 신속하게 영으로 뚫고 들어가려면

1) 죄와의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전서 4:5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셨습니다. 성결되는 데는 달리 왕도가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서 자신의 비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기도를 통해 발견한 것을 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적당히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며 습관을 좇아 기도하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믿음의 3단계 쯤 되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즐겨하며 기도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죄를 버리고자 처절할 정도로 노력하던 예전의 모습이 점점 식어지는 경우가 있지요. 죄와의 싸움을 치열하게 할 때는 작은 것이라도 죄성을 발견하면, 정녕 마음을 찢으며 어찌하든 죄를 버리고자 금식하고 철야하기를 힘쓰게 됩니다. 이런 영적인 사모함에 변함이 없어서 죄의 쓴뿌리까지 다 뽑아버리도록 계속되면 좋은데, 죄와의 싸움에서 슬슬 요령을 피우면서 휴전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전쟁터에서도 한 번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면 그 여세를 몰아 완전히 적을 섬멸해야 하는데 주춤해 버리면 적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할 여유를 주게 되지요.
영적인 싸움도 3단계를 신속하게 뚫어 나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가 어느 정도 이루었다." 하는 영적인 나태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죄성의 근본 뿌리까지 뽑아버리도록 피 흘리기까지 싸우기를 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육신의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마음에 있는 비진리가 혼의 작용을 통해 나와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6-7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했습니다. 마음에 진리만 있으면 진리와 영의 생각만 나오며, 육신의 일도 범하지 않고 육신의 생각도 동원되지 않지요.
그러나 비진리가 있을 때는 혼을 통해 생각을 하게 될 때 비진리가 떠올려지게 됩니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 잘못된 자료를 입력하면 잘못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육신의 생각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쉬운 예로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십니다. 그런데 마음에 교만과 욕심이 있으면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받지 않고 주기만 하면 손해를 보게 되지 않는가?, 자기를 드러내어도 인정받기 힘든 세상에 섬기고 낮아지면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는가? 이런 육신의 생각이 들기 때문에 섬길 수도 없고 줄 수도 없게 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으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하신 것입니다.
매주 증거되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한 진리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인 줄은 알고 믿지요. 그런데 말씀을 들어서 점점 머리로 아는 것은 많아지는 반면에 아는 것만큼 마음에 온전히 이루지는 못할 때, 들은 진리의 말씀들을 자신의 악과 교묘하게 결합시켜 새로운 유형의 육신의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들은 말씀으로 자신의 죄악을 발견해야 하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하기도 하고 자신의 잘못을 핑계대며 정당화시키기 위해 진리를 짝이 맞지 않게 적용하기도 하지요. 그러한 육신의 생각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기적인 의와 자기적인 틀입니다.

먼저 "자기 의"란 단적으로 말해 "내가 옳다"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에게도 자기 의를 따르도록 강요하므로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심방하거나 충성하지 않는 사람을 볼 때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를 깨우쳐 주려고 "일꾼이라 하면서 그렇게 게으르면 되겠습니까?" 지적하며 권면하지요.
혹은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내 주변에 이러이러하게 게으른 사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때 본인이나 주변 사람이 들으면, 누구에 대한 말인지를 쉽게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상대를 드러내어 말하는 것이지요. 물론 열심내고 충성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지적하는 것을 통해 상대가 은혜받고 회개하면 다행이지만 상대가 그 말을 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찌른다." 생각하여 은혜가 떨어지거나 실족할 수도 있지요.
비록 상대의 잘못을 권면해야 한다 해도 성결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위로부터 지혜를 받으면 상대의 마음을 감동시킬 선한 방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자신이 아는 진리가 옳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방법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상대가 상처받거나 실족했다 해도 여전히 나는 옳고 상대가 악하다.고만 생각하지요. 곧 내용이 의롭고 선하다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방법이 선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하라, 섬기라, 판단하지 말라."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충성한다.", "상대를 사랑하여 옳은 것을 권면했다." 생각합니다. 이렇게 "내가 옳다." 생각하는 것이 자기 의로서, 이로 인해 자신의 악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며, 성결의 길로 신속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너무나 옳고 선한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피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 버릴 수가 있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자기 틀"이란 "이것만이 옳은 것이다." 하고 자기 나름대로 진리를 규정하여 만들어 놓은 틀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할 때 믿음이 없는 부모님이나 남편의 입장에서는 가족과는 멀어진 것처럼 느끼므로 서운할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는 것과 동시에 가족들의 마음과 입장을 생각하여 진리 안에서 잘 섬기고 사랑하므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자기적인 틀을 만들게 되면 가족들의 마음에 서운함과 상처를 주게 됩니다. "사사로운 정과 욕심을 끊고 영의 사랑을 이뤄야 한다.", "가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할 때도 하나님을 먼저 기쁘시게 해야 하나님께서 감동받으셔서 신속하게 역사하신다." 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틀을 만들므로 진리를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 부모님에게 자녀로서의 도리를 하지도 않으면서 "저는 부모님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 저에게 육적인 정을 기대하지 마세요." 말합니다. 부모님의 생신 때 부모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선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도지나 성경책 등을 드리면서 영적인 사랑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모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전도의 문을 막아놓고도 틀이 있는 사람은 깨닫지를 못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부모님도 영적으로 섬기며 온 집에 충성했다."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하는 것이 진리다, 영이다." 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녕 영의 마음이라면 진리 안에서 이도 저도 가한 마음이 되어야 하고 비록 자신이 더 옳을 때도 상대의 믿음과 형편에 맞춰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 전도했던 사도 바울처럼 선한 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자기 틀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이 진리라 생각하는 것만을 고집하므로 화평을 깨뜨리며 자기중심적이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지만, 정작 본인은 "나는 화평을 깨려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좇았을 뿐이다." 생각합니다. 이러한 육신의 틀 가운데 안주하고 있으므로 자기 발견이 불가능하며 믿음의 성장이 정체되는 것이지요.
자기 의와 자기 틀은 어찌 보면 매우 비슷하지만 분명히 구별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틀이 강하기는 하지만 자기만 그 틀 안에서 머물러 있어서 다른 사람까지 힘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곧 틀은 강하여 잘 깨어지지 않으나 자기 의를 강하게 내세우지는 않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자기 틀이 강해서 자신도 그 틀 안에서만 행하려고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틀대로 따라 주도록 강요하며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나 자기 틀은 결국 비진리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이를 통해 작용되는 육신의 생각들을 깨뜨려버릴 때라야 영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서 1:23에 보면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했습니다. 거울을 보아 머리가 흐트러졌으면 빗어야 하고 더러운 것이 묻었으면 씻어야 하지요. 말씀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은혜 주시는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신속하게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죄가 없고 거룩한 참마음과 흠도 티도 없이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녀들로 인정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2-19 오후 7:18:54 Posted
2019-09-09 오전 11:37:0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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