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TOTAL : 1647 PAGE : 3/114
2026-01-02
제1과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고린도전서 15:31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5:31 | 외울말씀 : 고린도후서 5:17 | 참고 말씀: 사무엘상 15:22
교육목표 : 새해를 맞이하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며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신앙이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성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만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지요.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고백하며 신속히 온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진리의 사람으로 새로워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충성한다 해도 사심이 있으면 상대를 힘들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낼 수가 없지요.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일꾼이라면 육의 정과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특히 주의 종이라면 내 부모나 자녀, 육의 가족보다 맡은 양 떼들을 더 귀히 여겨야 하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으려면 탐심은 물론이고 자존심이나 교만도 버려야 하고, 명예욕, 권세욕도 버려야 합니다.
나를 잘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누구를 대한다 해도 태도와 안색이 달라져서도 안 되지요.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사심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핑계가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일을 하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했다.” 하지요.
가령, 성도들에게 이러 이러한 용도로 예물을 모으자 하거나 야외로 나가 어떤 모임을 갖자고 합니다. 굳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이런 일을 추진했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려고 굳이 일을 벌이지요. 어떤 행사를 치를 때도 성도들의 입장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진행합니다.
이럴 때는 구성원들의 마음이 하나 되기 쉽지 않고 그 열매도 육의 열매가 나옵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고집하면서 자기 사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혹여 나는 어떤 일을 하거나 말 한마디 속에도 ‘주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내 의욕이 앞서고 내 공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아닌지, 섬김 받으려는 마음은 아닌지, 내 유익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날마다 자신을 면밀히 점검하여 정결하게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2.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영의 일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 세상 것을 바라보고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말로는 영을 사모한다 하면서 그 마음과 생각이 육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시선이 육의 것을 향하지요. 이런 사람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데 의외로 나름대로 믿음 있다, 일꾼이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충성한다 하는 사람들 중에 중한 육체의 일을 범하는 것을 봅니다. 이들도 처음부터 중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큰 죄는 아니니까.” 하면서 작은 육의 것들을 허용하는 데서 문제가 시작되었지요. 마음과 생각에 육을 허용하는 만큼 성령 충만함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육을 허용했기 때문에 처음 받은 은혜가 떨어졌고, 첫사랑을 잃어버렸으며 기도하는 게 싫어졌고, 예배드리는 것이 해이해진 것입니다. 자꾸 세상 것만 추구하게 되고,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이 쌓이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귀가 둔해지고, 죄를 경계하는 마음이 무뎌져서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큰 죄까지 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 첫사랑의 뜨거움을 체험했을 때는 온 마음과 생각을 영의 일들로 채웠을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잃지 않으려면 전에 취하던 작은 육의 일들도 하나하나 끊고, 여가 시간에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런 열정이 식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올수록 더 열정이 뜨거워져야지, 결코 제자리걸음 한다든가 식어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영의 일들입니다. “어찌하면 말씀을 더 무장할까, 어찌하면 더 기도할까, 어찌하면 속히 변화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까, 어찌하면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고 충만함을 줄까.” 이런 영의 일들만 생각해야 합니다.
길을 가면서도, 잠들기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을 변화시키고 믿음의 형제들에게 은혜를 끼칠 생각을 해야지요. 영의 일들만 생각하며 영의 것으로 마음을 채워 나가면 성령의 충만함을 잃지 않습니다. 동행하시며 보장하시는 주님을 늘 체험하기에 허전함이나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어찌하든 변화되어 성결을 이루고 사명 감당 잘하여 많은 열매를 낼까 힘쓰는 것이지요.
3.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처럼 저도 가장 소중한 것을 주께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은 쉽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순종하는 일꾼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입장이 되면 온갖 육신의 생각들을 동원하는 것이지요. “아니, 이삭을 통해 후손을 번성케 하신다 하셨는데, 이제는 그 언약의 말씀을 번복하시는가?” 이런저런 육신의 생각 속에 충만함이 떨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원망과 서운한 마음을 품기도 합니다.
자기 의와 틀과 생각에 맞을 때만 순종하는 것은 순종한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심도, 육신의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순종하겠다고 결심해도 육이 있으면 불순종이 나옵니다. 충분히 순종할 수 있는 일조차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고 이유를 대면서 불순종하지요. 그러니 자기 한계 속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령 “영의 일만 생각하라.” 하면 그 순간에는 “아멘” 하고 “영의 일만 생각하게 하소서.”라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구습대로 육신의 생각을 하면서도 차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 속에 빠져들어 육을 취해 가는데도 깨우치지 못하지요. 들은 말씀은 있고 기도한 것이 있어서 마음에 찔림은 되지만 “이것쯤이야 큰 죄는 아니니까.” 하며 넘어가 버립니다.
이처럼 죄에 대해 단호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면 신앙이 정체되거나 퇴보하며 정진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결여가 있어도 채울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도 없지요.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가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가장 빠른 길은 진리에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고 진리대로만 행하면 됩니다. 이렇게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주님의 손을 붙잡고 한걸음, 한걸음 인도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성공하려면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고 인내로 자신을 다스려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성공의 길을 아무리 알아도 게으름과 정욕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그 길로 갈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 중에서도 종종 극적으로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방탕하여 구제불능의 삶을 살던 사람이 큰 위험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에는 하루아침에 변화되어 반듯하고 성실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공부를 전혀 안 하고 놀기만 하던 학생이 어떤 일로 충격을 받아 밤낮으로 공부해서 우등생이 되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을 보면 주변에서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완전히 달려졌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사심을 버리고 영의 일만 생각하며 온전한 순종을 이룸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날마다 새로워져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죄에 대해 단호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면 신앙이 정체되거나 퇴보하며 정진해 나갈 수 없다. 영으로 들어가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가장 빠른 길은 진리에 즉시 ( )하는 것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순종의 유형
1. 명령에 억지로 순종하는 경우
2. 자기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만 순종하는 경우 지시나 명령이 자기 생각에 맞을 때만 순종하고 맞지 않을 때는 불순종한다.
3. 무조건 순종하는 경우 자신이 할 수 있나 없나, 자기 생각에 맞나 틀리나를 따지지 않고 자기 의사 없이 무조건 아멘 한다.
4.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기꺼이 순종하는 경우 순종할 때 이루어질 일의 결과도 대략 마음에 그려지고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한다.
교육목표 : 새해를 맞이하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며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신앙이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성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만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지요.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고백하며 신속히 온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진리의 사람으로 새로워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충성한다 해도 사심이 있으면 상대를 힘들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낼 수가 없지요.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일꾼이라면 육의 정과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특히 주의 종이라면 내 부모나 자녀, 육의 가족보다 맡은 양 떼들을 더 귀히 여겨야 하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으려면 탐심은 물론이고 자존심이나 교만도 버려야 하고, 명예욕, 권세욕도 버려야 합니다.
나를 잘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누구를 대한다 해도 태도와 안색이 달라져서도 안 되지요.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사심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핑계가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일을 하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했다.” 하지요.
가령, 성도들에게 이러 이러한 용도로 예물을 모으자 하거나 야외로 나가 어떤 모임을 갖자고 합니다. 굳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이런 일을 추진했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려고 굳이 일을 벌이지요. 어떤 행사를 치를 때도 성도들의 입장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진행합니다.
이럴 때는 구성원들의 마음이 하나 되기 쉽지 않고 그 열매도 육의 열매가 나옵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고집하면서 자기 사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혹여 나는 어떤 일을 하거나 말 한마디 속에도 ‘주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내 의욕이 앞서고 내 공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아닌지, 섬김 받으려는 마음은 아닌지, 내 유익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날마다 자신을 면밀히 점검하여 정결하게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2.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영의 일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 세상 것을 바라보고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말로는 영을 사모한다 하면서 그 마음과 생각이 육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시선이 육의 것을 향하지요. 이런 사람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데 의외로 나름대로 믿음 있다, 일꾼이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충성한다 하는 사람들 중에 중한 육체의 일을 범하는 것을 봅니다. 이들도 처음부터 중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큰 죄는 아니니까.” 하면서 작은 육의 것들을 허용하는 데서 문제가 시작되었지요. 마음과 생각에 육을 허용하는 만큼 성령 충만함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육을 허용했기 때문에 처음 받은 은혜가 떨어졌고, 첫사랑을 잃어버렸으며 기도하는 게 싫어졌고, 예배드리는 것이 해이해진 것입니다. 자꾸 세상 것만 추구하게 되고,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이 쌓이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귀가 둔해지고, 죄를 경계하는 마음이 무뎌져서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큰 죄까지 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 첫사랑의 뜨거움을 체험했을 때는 온 마음과 생각을 영의 일들로 채웠을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잃지 않으려면 전에 취하던 작은 육의 일들도 하나하나 끊고, 여가 시간에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런 열정이 식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올수록 더 열정이 뜨거워져야지, 결코 제자리걸음 한다든가 식어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영의 일들입니다. “어찌하면 말씀을 더 무장할까, 어찌하면 더 기도할까, 어찌하면 속히 변화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까, 어찌하면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고 충만함을 줄까.” 이런 영의 일들만 생각해야 합니다.
길을 가면서도, 잠들기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을 변화시키고 믿음의 형제들에게 은혜를 끼칠 생각을 해야지요. 영의 일들만 생각하며 영의 것으로 마음을 채워 나가면 성령의 충만함을 잃지 않습니다. 동행하시며 보장하시는 주님을 늘 체험하기에 허전함이나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어찌하든 변화되어 성결을 이루고 사명 감당 잘하여 많은 열매를 낼까 힘쓰는 것이지요.
3.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처럼 저도 가장 소중한 것을 주께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은 쉽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순종하는 일꾼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입장이 되면 온갖 육신의 생각들을 동원하는 것이지요. “아니, 이삭을 통해 후손을 번성케 하신다 하셨는데, 이제는 그 언약의 말씀을 번복하시는가?” 이런저런 육신의 생각 속에 충만함이 떨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원망과 서운한 마음을 품기도 합니다.
자기 의와 틀과 생각에 맞을 때만 순종하는 것은 순종한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심도, 육신의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순종하겠다고 결심해도 육이 있으면 불순종이 나옵니다. 충분히 순종할 수 있는 일조차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고 이유를 대면서 불순종하지요. 그러니 자기 한계 속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령 “영의 일만 생각하라.” 하면 그 순간에는 “아멘” 하고 “영의 일만 생각하게 하소서.”라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구습대로 육신의 생각을 하면서도 차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 속에 빠져들어 육을 취해 가는데도 깨우치지 못하지요. 들은 말씀은 있고 기도한 것이 있어서 마음에 찔림은 되지만 “이것쯤이야 큰 죄는 아니니까.” 하며 넘어가 버립니다.
이처럼 죄에 대해 단호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면 신앙이 정체되거나 퇴보하며 정진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결여가 있어도 채울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도 없지요.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가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가장 빠른 길은 진리에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고 진리대로만 행하면 됩니다. 이렇게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주님의 손을 붙잡고 한걸음, 한걸음 인도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성공하려면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고 인내로 자신을 다스려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성공의 길을 아무리 알아도 게으름과 정욕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그 길로 갈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 중에서도 종종 극적으로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방탕하여 구제불능의 삶을 살던 사람이 큰 위험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에는 하루아침에 변화되어 반듯하고 성실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공부를 전혀 안 하고 놀기만 하던 학생이 어떤 일로 충격을 받아 밤낮으로 공부해서 우등생이 되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을 보면 주변에서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완전히 달려졌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사심을 버리고 영의 일만 생각하며 온전한 순종을 이룸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날마다 새로워져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죄에 대해 단호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면 신앙이 정체되거나 퇴보하며 정진해 나갈 수 없다. 영으로 들어가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가장 빠른 길은 진리에 즉시 ( )하는 것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순종의 유형
1. 명령에 억지로 순종하는 경우
2. 자기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만 순종하는 경우 지시나 명령이 자기 생각에 맞을 때만 순종하고 맞지 않을 때는 불순종한다.
3. 무조건 순종하는 경우 자신이 할 수 있나 없나, 자기 생각에 맞나 틀리나를 따지지 않고 자기 의사 없이 무조건 아멘 한다.
4.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기꺼이 순종하는 경우 순종할 때 이루어질 일의 결과도 대략 마음에 그려지고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한다.
2025-12-26
제52과온전한 사랑
고전 13:8~13
읽을말씀 : 고전 13:8~13 | 외울말씀 : 고전 13:13 | 참고 말씀: 시 103:15
교육목표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말씀대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 속한 풀, 꽃, 나무와 같이 육의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15절에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말씀합니다. 부와 명예, 권세 등도 모두 변하고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죄와 어둠도 없어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사랑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에 천국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1.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예언이나 방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왜 이것도 사라진다고 하는 것일까요? 영의 세계인 천국은 온전한 곳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언한다 해도 장차 천국에서 알고 깨닫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예언이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방언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나라나 민족, 지역에 따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화하려면 서로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이런 걱정이 없습니다.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할 염려가 없고, 선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오해나 편견이 생기지 않지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열심히 배웁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지만 이는 천국 가는 데 필요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언이나 방언, 지식 등은 영에 속한 것이지만 천국 가기 위해 한시적으로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폐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천국에서도 폐하지 않으며 마음에 할례하여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만큼 더 좋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한 사랑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 “...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2)
어린아이에게 오백 원짜리 동전과 오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면 으레 동전을 집습니다. 오백 원으로 과자를 사 봤지만 지폐로는 안 사 보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모르지요. 우리가 천국을 알고 깨닫는 깊이도 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은 알지만,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광채가 얼마나 찬란한지 온전히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장차 천국에 이르면 그때는 무한히 넓고 신비로운 영의 세계와 모든 것이 운행되는 원리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이처럼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에 차이가 나지요. 요한일서 2장에 보면 믿음의 각 단계를 자녀, 아이, 청년, 아비에 비유해 놓았습니다. 자녀나 아이의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고 잘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 후 청년의 믿음이 되고 더 장성하여 아비의 믿음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차원도 달라지지요. 하지만 아무리 이 땅에서 아비의 믿음을 이뤘다 해도 육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천국에 비하면 역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또한 영원한 천국에 비하면 이 세상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림자는 해가 지면 사라지는 허상이며,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닮은 모형에 불과하지요. 이 세상은 영원한 세계가 어떠한지 짐작하게 하는 그림자일 뿐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림자 같은 삶이 지나면 그때에는 실체인 천국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영의 세계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천국에 가면 얼굴을 마주하고 보는 것처럼 뚜렷이 알게 되지요. 사도 바울이 사랑장을 기록한 시대는 약 2천 년 전입니다. 당시 거울은 은, 청동, 철 등으로 만들어져 지금처럼 선명하지 않았기에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한 것입니다.
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데 믿음과 소망은 매우 귀한 덕목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원과 영생, 천국을 얻을 수 있기에 믿음은 보배 중에 보배이며, 응답의 열쇠입니다. 또한 소망을 가짐으로써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확실히 믿는다면 천국을 소망하지요. 또한 소망이 있다면 죄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 힘쓰고 열심히 충성합니다. 이처럼 믿음과 소망은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그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는, 믿음과 소망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사랑만 남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이미 그곳에 있기 때문에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필요 없으며, 소망 역시 필요치 않습니다. 진정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이 장성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주님이 사무치도록 뵙고 싶어지지요.
이처럼 천국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이 땅에서 좁고 험한 길을 가더라도 “힘들다, 괴롭다.” 하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종 목적지인 천국에 이르면 믿음과 소망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이어지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는,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으로 행한 만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를 버리고 아름다운 마음을 이룬 만큼 영적인 믿음이 주어지고 이 믿음의 분량에 따라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 성으로 처소가 구분됩니다.
낙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겨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들어갑니다. 1천층은 하나님을 믿은 후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2천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가지요. 3천층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악은 모양이라도 버린 성결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나아가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온 집에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믿음으로 온전한 사랑을 이룬 하나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천국으로서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원래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 새 예루살렘 성에 거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 길이 곧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에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팔복이 임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갖출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천국에 갈 수 있고, 소망이 있을 때 죄를 버릴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온전한 사랑이 있을 때라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사랑이 제일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언이나 방언,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영적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천국에 가면 왜 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2.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믿음과 소망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 )만 남기 때문이다.
②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 )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 ‘열두 기초석’에 담긴 영적 의미
① 벽옥(영적 믿음) ② 남보석(곧음과 절개)
③ 옥수(결백과 희생적 사랑)
④ 녹보석(의와 푸름, 정의롭고 깨끗함) ⑤ 홍마노(영적 충성)
⑥ 홍보석(열정적 사랑) ⑦ 황옥(자비) ⑧ 녹옥(오래 참음)
⑨ 담황옥(양선) ⑩ 비취옥(절제) ⑪ 청옥(청결함과 거룩함)
⑫ 자정(온유)
교육목표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말씀대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 속한 풀, 꽃, 나무와 같이 육의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15절에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말씀합니다. 부와 명예, 권세 등도 모두 변하고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죄와 어둠도 없어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사랑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에 천국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1.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예언이나 방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왜 이것도 사라진다고 하는 것일까요? 영의 세계인 천국은 온전한 곳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언한다 해도 장차 천국에서 알고 깨닫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예언이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방언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나라나 민족, 지역에 따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화하려면 서로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이런 걱정이 없습니다.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할 염려가 없고, 선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오해나 편견이 생기지 않지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열심히 배웁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지만 이는 천국 가는 데 필요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언이나 방언, 지식 등은 영에 속한 것이지만 천국 가기 위해 한시적으로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폐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천국에서도 폐하지 않으며 마음에 할례하여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만큼 더 좋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한 사랑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 “...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2)
어린아이에게 오백 원짜리 동전과 오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면 으레 동전을 집습니다. 오백 원으로 과자를 사 봤지만 지폐로는 안 사 보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모르지요. 우리가 천국을 알고 깨닫는 깊이도 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은 알지만,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광채가 얼마나 찬란한지 온전히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장차 천국에 이르면 그때는 무한히 넓고 신비로운 영의 세계와 모든 것이 운행되는 원리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이처럼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에 차이가 나지요. 요한일서 2장에 보면 믿음의 각 단계를 자녀, 아이, 청년, 아비에 비유해 놓았습니다. 자녀나 아이의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고 잘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 후 청년의 믿음이 되고 더 장성하여 아비의 믿음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차원도 달라지지요. 하지만 아무리 이 땅에서 아비의 믿음을 이뤘다 해도 육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천국에 비하면 역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또한 영원한 천국에 비하면 이 세상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림자는 해가 지면 사라지는 허상이며,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닮은 모형에 불과하지요. 이 세상은 영원한 세계가 어떠한지 짐작하게 하는 그림자일 뿐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림자 같은 삶이 지나면 그때에는 실체인 천국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영의 세계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천국에 가면 얼굴을 마주하고 보는 것처럼 뚜렷이 알게 되지요. 사도 바울이 사랑장을 기록한 시대는 약 2천 년 전입니다. 당시 거울은 은, 청동, 철 등으로 만들어져 지금처럼 선명하지 않았기에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한 것입니다.
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데 믿음과 소망은 매우 귀한 덕목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원과 영생, 천국을 얻을 수 있기에 믿음은 보배 중에 보배이며, 응답의 열쇠입니다. 또한 소망을 가짐으로써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확실히 믿는다면 천국을 소망하지요. 또한 소망이 있다면 죄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 힘쓰고 열심히 충성합니다. 이처럼 믿음과 소망은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그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는, 믿음과 소망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사랑만 남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이미 그곳에 있기 때문에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필요 없으며, 소망 역시 필요치 않습니다. 진정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이 장성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주님이 사무치도록 뵙고 싶어지지요.
이처럼 천국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이 땅에서 좁고 험한 길을 가더라도 “힘들다, 괴롭다.” 하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종 목적지인 천국에 이르면 믿음과 소망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이어지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는,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으로 행한 만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를 버리고 아름다운 마음을 이룬 만큼 영적인 믿음이 주어지고 이 믿음의 분량에 따라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 성으로 처소가 구분됩니다.
낙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겨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들어갑니다. 1천층은 하나님을 믿은 후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2천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가지요. 3천층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악은 모양이라도 버린 성결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나아가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온 집에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믿음으로 온전한 사랑을 이룬 하나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천국으로서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원래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 새 예루살렘 성에 거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 길이 곧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에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팔복이 임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갖출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천국에 갈 수 있고, 소망이 있을 때 죄를 버릴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온전한 사랑이 있을 때라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사랑이 제일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언이나 방언,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영적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천국에 가면 왜 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2.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믿음과 소망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 )만 남기 때문이다.
②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 )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 ‘열두 기초석’에 담긴 영적 의미
① 벽옥(영적 믿음) ② 남보석(곧음과 절개)
③ 옥수(결백과 희생적 사랑)
④ 녹보석(의와 푸름, 정의롭고 깨끗함) ⑤ 홍마노(영적 충성)
⑥ 홍보석(열정적 사랑) ⑦ 황옥(자비) ⑧ 녹옥(오래 참음)
⑨ 담황옥(양선) ⑩ 비취옥(절제) ⑪ 청옥(청결함과 거룩함)
⑫ 자정(온유)
2025-12-19
제51과주님은 누구의 구주이신가
마태복음 2:1~12
읽을말씀 : 마태복음 2:1~12 | 외울말씀 : 누가복음 2:14 | 참고 말씀: 마태복음 1:21
교육목표 :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영적인 황금, 유향, 몰약을 드릴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온 인류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1.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호화로운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전 3:18). 원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으니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고 죄 가운데 짐승과 다름없이 정욕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참된 양식, 곧 영의 양식이 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습니다(요 6:51~5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영이 죽어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 친히 영의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마태복음 2장 1절 이하를 보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합니다. 그러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이 소식을 듣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 준 대로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를 찾거든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함이 아니라 죽이고자 함이었지요.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을 찾아가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박사들의 꿈에 헤롯왕에게 가지 말라는 지시를 하시니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도 꿈을 통해 지시를 받아 온 가족이 헤롯왕을 피해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고 경배한 사람은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8~20절에,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주었지요. 양 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안나’라는 여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나이 많아 늙었는데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눅 2:36~38).
3. 세 가지 예물의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세 가지 예물을 드렸습니다.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지요. 이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예수님은 세 가지 예물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1) 황금의 영적 의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황금은 재물과 부귀를 뜻합니다. 그런데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신 대로 황금은 또한 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는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풍족하였으나, 아담의 범죄로 그의 후손들도 가난과 고통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친히 가난한 길을 가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신 것입니다(고후 8:9).
부의 상징인 황금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셨을까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2) 유향의 영적 의미
유향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줍니다. 유향을 예물로 드린 영적 의미는 더럽고 냄새나는 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에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여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유향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3) 몰약의 영적 의미
몰약은 고대로부터 방향제 및 방부제로 사용되었으며 즙액은 향수, 의료품, 구강 소독 등에 쓰이고 장사 지낼 때 시체를 썩지 않게 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몰약을 예물로 드린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 즉 변함없는 믿음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죽은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4. 성탄절의 영적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조건 만인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문 열고 주님을 영접해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을 수 있지요.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듯이, 우리도 영원한 천국을 주신 주님께 귀한 예물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을 사모하며 주님의 마음을 닮아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 가지 예물의 영적 의미를 깨달아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은 재물과 부귀를 뜻하기도 하고,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 )을 뜻하기도 한다.
2. ( )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준다. 이것을 드리는 영적 의미는 더럽고 냄새나는 악을 버리고 ( )를 발한다는 것이다.
3. 몰약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안나 선지자’
아기 예수님이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에 들어올 때 메시아임을 알아본 나이 많은 여선지자이다. 그녀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로 결혼한 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일생을 믿음으로 살아왔기에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눅 2:36~38).
교육목표 :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영적인 황금, 유향, 몰약을 드릴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온 인류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1.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호화로운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전 3:18). 원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으니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고 죄 가운데 짐승과 다름없이 정욕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참된 양식, 곧 영의 양식이 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습니다(요 6:51~5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영이 죽어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 친히 영의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마태복음 2장 1절 이하를 보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합니다. 그러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이 소식을 듣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 준 대로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를 찾거든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함이 아니라 죽이고자 함이었지요.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을 찾아가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박사들의 꿈에 헤롯왕에게 가지 말라는 지시를 하시니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도 꿈을 통해 지시를 받아 온 가족이 헤롯왕을 피해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고 경배한 사람은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8~20절에,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주었지요. 양 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안나’라는 여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나이 많아 늙었는데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눅 2:36~38).
3. 세 가지 예물의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세 가지 예물을 드렸습니다.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지요. 이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예수님은 세 가지 예물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1) 황금의 영적 의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황금은 재물과 부귀를 뜻합니다. 그런데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신 대로 황금은 또한 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는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풍족하였으나, 아담의 범죄로 그의 후손들도 가난과 고통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친히 가난한 길을 가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신 것입니다(고후 8:9).
부의 상징인 황금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셨을까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2) 유향의 영적 의미
유향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줍니다. 유향을 예물로 드린 영적 의미는 더럽고 냄새나는 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에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여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유향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3) 몰약의 영적 의미
몰약은 고대로부터 방향제 및 방부제로 사용되었으며 즙액은 향수, 의료품, 구강 소독 등에 쓰이고 장사 지낼 때 시체를 썩지 않게 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몰약을 예물로 드린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 즉 변함없는 믿음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죽은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4. 성탄절의 영적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조건 만인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문 열고 주님을 영접해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을 수 있지요.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듯이, 우리도 영원한 천국을 주신 주님께 귀한 예물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을 사모하며 주님의 마음을 닮아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 가지 예물의 영적 의미를 깨달아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은 재물과 부귀를 뜻하기도 하고,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 )을 뜻하기도 한다.
2. ( )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준다. 이것을 드리는 영적 의미는 더럽고 냄새나는 악을 버리고 ( )를 발한다는 것이다.
3. 몰약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안나 선지자’
아기 예수님이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에 들어올 때 메시아임을 알아본 나이 많은 여선지자이다. 그녀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로 결혼한 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일생을 믿음으로 살아왔기에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눅 2:36~38).
2025-12-12
제50과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
고전 13:7
읽을말씀 : 고전 13:7 | 외울말씀 : 벧전 1:7 | 참고 말씀: 마 5:11~12
교육목표 :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딤으로 어떤 연단도 넉넉히 이겨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는데 모든 것을 견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영적인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다 보면 그에 따른 여파가 오기 마련입니다. 마치 큰 물결이 지나가면 그 뒤를 따라 잔물결이 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참을 때에도 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오기도 하고 마음에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여파를 견디는 것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1.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
마태복음 5장 39절에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상대에게 악으로 대항하지 않고 잠잠히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아픔은 어쩔 수 없지요. 이때 억울하게 맞았다고 마음이 쓰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대를 화나게 한 것이 민망해서 마음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분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표출하는 형제를 보니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요.
참음의 여파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외부 환경으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오른뺨을 때릴 때 참고 왼편을 돌려댔는데 사정없이 왼뺨까지 때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다니엘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갈 줄을 알고도 기도를 쉬지 않았지요.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을 시기하여 죽음으로 몰아가는 무리에게 악으로 대항치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참으니 상황이 곧바로 좋아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굶주린 사자가 울부짖는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에 위배되는 것을 참았으니 곧바로 시험이 물러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러한 연단이 따를까요? 이는 우리를 온전케 하고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농작물은 비, 바람, 따가운 햇살을 견딤으로 실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견디는 시간을 통해 알곡으로 맺혀지지요.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오는 것이 바로 인간 경작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2. 연단은 축복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 가운데 살지 못하도록 어찌하든 훼방합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조금의 흠과 티만 보여도 송사를 하지요. 예를 들어,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볼 때 겉으로는 참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보기 싫다, 이해할 수 없다.’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송사하여 연단이 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다고 인정받기까지는 크든 작든 연단이라는 테스트가 따르지요.
물론 악이 전혀 없다 해도 연단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축복을 주시려는 연단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 온전한 선을 이루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축복을 주실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이런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베푸시기 위해서는 그만큼 공의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큰 믿음과 사랑의 행함으로 응답받을 만한 그릇임을 증명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못하지요.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시련의 비바람을 견디게 하십니다. 그럴 때 오직 선과 사랑으로 인내하면 결국 승리하여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애매히 받는 핍박이나 고난을 잘 이기면 반드시 축복이 옵니다. 그러면 연단 속에서도 어떻게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야 할까요?
3.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려면
1) 연단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이 끝나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애매히 고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나를 더 좋은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허락하신 연단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사랑을 믿되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에는 아픔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크고 시간이 길어지면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새기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꼭 좋은 천국으로 이끌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면 결국 온전한 사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한 대로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과 같습니다.
때로 자신을 볼 때 ‘어느 세월에 변화될까?’ 할 수도 있지만 연마 끝에 빛나는 보석처럼 연단을 잘 견딤으로 변화되면 결국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자녀가 됩니다. 그러니 연단을 통과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좀 더 쉬운 길로 가기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연단을 피해 가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주위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만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이럴 때에도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를 마주할 때의 힘듦을 인내하며 상대를 진정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이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변화되도록 이끄십니다. 이처럼 연단의 상황들 하나하나가 소망을 이루는 징검다리가 되고 지름길이 됩니다.
3) 모든 것을 견디려면 오직 선만 행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모든 것을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적으로 보면 시험 환난은 사람이나 환경으로 인해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믿음의 시련은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곧 시험, 환난은 선과 악의 싸움입니다.
이런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영계의 법칙대로 싸워야 합니다. 영계의 법칙은 결국 선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당장에는 지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반드시 선이 승리합니다. 만일 가족에게 핍박받을 때 ‘내 남편은, 내 아내는 왜 저렇게 악할까?’라고 생각한다면 연단의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랑으로 기도해 주고, 주 안에서 섬김으로 가정을 환하게 밝히는 빛이 되는 것이 선입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으면 가장 좋은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선을 행할 때 풀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람의 힘이나 지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험을 만나든지 오직 선으로 인내하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나에게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하는 일마다 주변 사람에게 피해만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고, 걸핏하면 불평하고 토라지는 사람도 있지요. 안하무인으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참사랑을 이루면 견디기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하신 대로 상대를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연단 속에서도 어떻게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야 할까요?
① 연단 중에도 ( )의 ( )을 굳게 믿어야 한다.
② 연단이 ( )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믿어야 한다.
③ 모든 것을 견디려면 오직 ( )만 행해야 한다.
2. 상대가 오른뺨을 때릴 때 참고 왼편을 돌려댔는데 사정없이 왼뺨까지 때립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서 참았는데도 상황이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랑에 위배되는 것을 참았으니 곧바로 시험이 물러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러한 연단이 따르는 것일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천국에는 마음에 이룬 사랑만 가져갈 수 있다!
천국에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야 할까?
이 땅의 아무리 귀한 황금보석, 금, 다이아몬드도 천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이 땅에서 가져가면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 있다.
‘사랑’이다. 눈물, 슬픔, 죄가 있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에 이룬 사랑, 천국에 가져가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딤으로 어떤 연단도 넉넉히 이겨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는데 모든 것을 견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영적인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다 보면 그에 따른 여파가 오기 마련입니다. 마치 큰 물결이 지나가면 그 뒤를 따라 잔물결이 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참을 때에도 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오기도 하고 마음에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여파를 견디는 것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1.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
마태복음 5장 39절에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상대에게 악으로 대항하지 않고 잠잠히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아픔은 어쩔 수 없지요. 이때 억울하게 맞았다고 마음이 쓰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대를 화나게 한 것이 민망해서 마음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분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표출하는 형제를 보니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요.
참음의 여파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외부 환경으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오른뺨을 때릴 때 참고 왼편을 돌려댔는데 사정없이 왼뺨까지 때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다니엘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갈 줄을 알고도 기도를 쉬지 않았지요.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을 시기하여 죽음으로 몰아가는 무리에게 악으로 대항치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참으니 상황이 곧바로 좋아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굶주린 사자가 울부짖는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에 위배되는 것을 참았으니 곧바로 시험이 물러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러한 연단이 따를까요? 이는 우리를 온전케 하고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농작물은 비, 바람, 따가운 햇살을 견딤으로 실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견디는 시간을 통해 알곡으로 맺혀지지요.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오는 것이 바로 인간 경작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2. 연단은 축복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 가운데 살지 못하도록 어찌하든 훼방합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조금의 흠과 티만 보여도 송사를 하지요. 예를 들어,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볼 때 겉으로는 참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보기 싫다, 이해할 수 없다.’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송사하여 연단이 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다고 인정받기까지는 크든 작든 연단이라는 테스트가 따르지요.
물론 악이 전혀 없다 해도 연단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축복을 주시려는 연단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 온전한 선을 이루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축복을 주실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이런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베푸시기 위해서는 그만큼 공의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큰 믿음과 사랑의 행함으로 응답받을 만한 그릇임을 증명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못하지요.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시련의 비바람을 견디게 하십니다. 그럴 때 오직 선과 사랑으로 인내하면 결국 승리하여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애매히 받는 핍박이나 고난을 잘 이기면 반드시 축복이 옵니다. 그러면 연단 속에서도 어떻게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야 할까요?
3.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려면
1) 연단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이 끝나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애매히 고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나를 더 좋은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허락하신 연단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사랑을 믿되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에는 아픔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크고 시간이 길어지면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새기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꼭 좋은 천국으로 이끌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면 결국 온전한 사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한 대로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과 같습니다.
때로 자신을 볼 때 ‘어느 세월에 변화될까?’ 할 수도 있지만 연마 끝에 빛나는 보석처럼 연단을 잘 견딤으로 변화되면 결국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자녀가 됩니다. 그러니 연단을 통과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좀 더 쉬운 길로 가기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연단을 피해 가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주위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만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이럴 때에도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를 마주할 때의 힘듦을 인내하며 상대를 진정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이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변화되도록 이끄십니다. 이처럼 연단의 상황들 하나하나가 소망을 이루는 징검다리가 되고 지름길이 됩니다.
3) 모든 것을 견디려면 오직 선만 행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모든 것을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적으로 보면 시험 환난은 사람이나 환경으로 인해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믿음의 시련은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곧 시험, 환난은 선과 악의 싸움입니다.
이런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영계의 법칙대로 싸워야 합니다. 영계의 법칙은 결국 선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당장에는 지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반드시 선이 승리합니다. 만일 가족에게 핍박받을 때 ‘내 남편은, 내 아내는 왜 저렇게 악할까?’라고 생각한다면 연단의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랑으로 기도해 주고, 주 안에서 섬김으로 가정을 환하게 밝히는 빛이 되는 것이 선입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으면 가장 좋은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선을 행할 때 풀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람의 힘이나 지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험을 만나든지 오직 선으로 인내하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나에게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하는 일마다 주변 사람에게 피해만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고, 걸핏하면 불평하고 토라지는 사람도 있지요. 안하무인으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참사랑을 이루면 견디기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하신 대로 상대를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연단 속에서도 어떻게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야 할까요?
① 연단 중에도 ( )의 ( )을 굳게 믿어야 한다.
② 연단이 ( )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믿어야 한다.
③ 모든 것을 견디려면 오직 ( )만 행해야 한다.
2. 상대가 오른뺨을 때릴 때 참고 왼편을 돌려댔는데 사정없이 왼뺨까지 때립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서 참았는데도 상황이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랑에 위배되는 것을 참았으니 곧바로 시험이 물러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러한 연단이 따르는 것일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천국에는 마음에 이룬 사랑만 가져갈 수 있다!
천국에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야 할까?
이 땅의 아무리 귀한 황금보석, 금, 다이아몬드도 천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이 땅에서 가져가면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 있다.
‘사랑’이다. 눈물, 슬픔, 죄가 있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에 이룬 사랑, 천국에 가져가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2025-12-05
제49과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는 것
고전 13:7
읽을말씀 : 고전 13:7 | 외울말씀 : 고전 13:7
교육목표 : 허물 많고 부족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오래 참고 변화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봐 줌으로 영적인 사랑을 더 키워 나가게 한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참아야 할 일이 많습니다. 혈기나 짜증이 나도 참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는 마음도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개념을 설명할 때도 가장 먼저 ‘오래 참고’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온갖 시련을 참는 자기와의 싸움이 ‘오래 참음’이라면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더욱 깊고 넓은 의미입니다. 오래 참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리로 일군 후 상대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1.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것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오직 선한 일만 행하셨는데도 악한 사람들은 조롱하고 멸시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이라 할지라도 참아 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중보기도 하셨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참으신 사랑의 결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에 이르게 되었지요.
우리 영혼의 주인 되신 아버지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고통을 기쁨으로 참고 기다리십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이 악을 행할지라도 선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보며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증한 우상을 섬길지라도 다시 하나님이 참 신임을 나타내 보이셨지요.
만약 “너는 불의가 가득하니 도저히 안 되겠어. 가망이 없구나. 더 이상은 못 참겠다.”라고 하나님이 하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오직 끝이 없고 한이 없는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의 모든 것을 믿어 줍니다. 부부 간에도 진정 사랑하면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설령 상대가 부족해도 어찌하든 믿어 주지요. 반면 사랑이 없으면 서로 간에 믿음도 없습니다. 판단 정죄하고 사사건건 다툽니다. 이처럼 믿음은 사랑의 크기를 보여 주는 하나의 척도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불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 명령에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보고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며 아브라함의 사랑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백퍼센트 믿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믿기에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은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 했는데,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으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을 때라야 열심히 마음에 할례하여 사랑과 위배되는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사실을 믿기에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이루면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차원에 이릅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뤘다는 것은 비진리의 마음을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비진리가 없으면 하늘로부터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주어집니다. 이때부터는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거나 신뢰가 흔들리지 않지요. 또한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룬 사람은 모든 사람을 믿습니다. 상대가 믿을 만해서가 아니라, 허물 많고 부족해도 믿음으로 바라봐 주지요.
우리 역시 어떤 사람도 믿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믿어야 합니다. 스스로 보기에 아직 부족하다 할지라도 나를 변화시키실 하나님을 믿고 변화될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계시는 성령님은 늘 “잘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말씀합니다. 그 사랑을 믿고 스스로도 “잘할 수 있다. 변화될 수 있다.”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이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인생들을 이처럼 믿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의 길로 나올 것을 믿으셨지요. 오직 믿음으로 바라보셨기에 예수님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영혼이라도 돌아올 것을 믿으십니다. 구원받은 자녀들은 변화되어 하나님을 꼭 닮은 자녀로 나올 것을 믿으시지요. 여러분도 이런 사랑으로 어떤 영혼이든지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
‘모든 것을 바란다’는 것은 믿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이뤄질 것을 바라게 됩니다.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과 세세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달려갑니다. 만일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없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답고 행복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이런 장래의 소망이 없으니 현실 속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투며 살지요. 그러나 아무리 갖고 누린다 해도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지요.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모든 것을 바라기 때문에 좁은 길을 갑니다. 왜 좁은 길이라고 합니까?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편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오락을 즐기지 않습니다. 주일에는 온종일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하는 등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기도합니다. 이 자체가 믿음이 없으면 힘들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했습니다. 육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많은 것을 절제하고 수고해야 하니 고생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어떤 것보다 행복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초가삼간이라도 행복하다고들 합니다. 하물며 아름다운 천국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히 살아갈 것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설레고 즐겁겠습니까?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믿는 모든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변함없이 기다리고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큰 힘이 있습니다. 자녀들 중에 말썽을 부리거나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이런 자녀라도 부모가 “잘할 수 있어!” 하며 믿어 주고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 주면 얼마든지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로 바뀔 수 있습니다. 부모의 믿음이 아이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자존감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고, 이러한 심리가 실제로도 학업 성적을 높인다고 합니다.
영혼을 갈무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생각 가운데 상대를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은 변화되기 어려울 것 같다.’ 하거나 ‘여전히 그 모습이구나.’ 하고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될 것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격려하며 끊임없이 기도해 주어야 하지요.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어떤 영혼이든지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 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가 마음에 있는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온갖 시련을 참는 자기와의 싸움이 ( )이라면, ( )는 것은 오래 참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리로 일군 후에 상대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참는 것을 말한다.
2. 사랑은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 했는데,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으려면 반드시 ( )이 있어야 한다.
3. ( )는 것은 믿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이뤄질 것을 바라게 된다.
● 알고 넘어갑시다!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을 통해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도시인 고린도 지방에 세워진 교회이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분쟁, 소송문제, 은사 나눔 문제, 부활 논쟁, 심지어 바울의 사도권까지 문제 삼았다. 또한 거짓 선지자가 들어와 훼방하며, 음행 같은 세상 문화가 들어와 교회를 더럽혔다. 빈부 격차에 제사 음식 먹는 것 가지고도 싸웠기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쓴 서신이 고린도전·후서이다.
교육목표 : 허물 많고 부족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오래 참고 변화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봐 줌으로 영적인 사랑을 더 키워 나가게 한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참아야 할 일이 많습니다. 혈기나 짜증이 나도 참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는 마음도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개념을 설명할 때도 가장 먼저 ‘오래 참고’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온갖 시련을 참는 자기와의 싸움이 ‘오래 참음’이라면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더욱 깊고 넓은 의미입니다. 오래 참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리로 일군 후 상대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1.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것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오직 선한 일만 행하셨는데도 악한 사람들은 조롱하고 멸시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이라 할지라도 참아 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중보기도 하셨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참으신 사랑의 결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에 이르게 되었지요.
우리 영혼의 주인 되신 아버지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고통을 기쁨으로 참고 기다리십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이 악을 행할지라도 선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보며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증한 우상을 섬길지라도 다시 하나님이 참 신임을 나타내 보이셨지요.
만약 “너는 불의가 가득하니 도저히 안 되겠어. 가망이 없구나. 더 이상은 못 참겠다.”라고 하나님이 하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오직 끝이 없고 한이 없는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의 모든 것을 믿어 줍니다. 부부 간에도 진정 사랑하면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설령 상대가 부족해도 어찌하든 믿어 주지요. 반면 사랑이 없으면 서로 간에 믿음도 없습니다. 판단 정죄하고 사사건건 다툽니다. 이처럼 믿음은 사랑의 크기를 보여 주는 하나의 척도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불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 명령에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보고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며 아브라함의 사랑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백퍼센트 믿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믿기에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은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 했는데,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으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을 때라야 열심히 마음에 할례하여 사랑과 위배되는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사실을 믿기에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이루면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차원에 이릅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뤘다는 것은 비진리의 마음을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비진리가 없으면 하늘로부터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주어집니다. 이때부터는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거나 신뢰가 흔들리지 않지요. 또한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룬 사람은 모든 사람을 믿습니다. 상대가 믿을 만해서가 아니라, 허물 많고 부족해도 믿음으로 바라봐 주지요.
우리 역시 어떤 사람도 믿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믿어야 합니다. 스스로 보기에 아직 부족하다 할지라도 나를 변화시키실 하나님을 믿고 변화될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계시는 성령님은 늘 “잘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말씀합니다. 그 사랑을 믿고 스스로도 “잘할 수 있다. 변화될 수 있다.”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이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인생들을 이처럼 믿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의 길로 나올 것을 믿으셨지요. 오직 믿음으로 바라보셨기에 예수님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영혼이라도 돌아올 것을 믿으십니다. 구원받은 자녀들은 변화되어 하나님을 꼭 닮은 자녀로 나올 것을 믿으시지요. 여러분도 이런 사랑으로 어떤 영혼이든지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
‘모든 것을 바란다’는 것은 믿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이뤄질 것을 바라게 됩니다.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과 세세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달려갑니다. 만일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없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답고 행복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이런 장래의 소망이 없으니 현실 속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투며 살지요. 그러나 아무리 갖고 누린다 해도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지요.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모든 것을 바라기 때문에 좁은 길을 갑니다. 왜 좁은 길이라고 합니까?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편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오락을 즐기지 않습니다. 주일에는 온종일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하는 등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기도합니다. 이 자체가 믿음이 없으면 힘들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했습니다. 육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많은 것을 절제하고 수고해야 하니 고생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어떤 것보다 행복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초가삼간이라도 행복하다고들 합니다. 하물며 아름다운 천국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히 살아갈 것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설레고 즐겁겠습니까?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믿는 모든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변함없이 기다리고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큰 힘이 있습니다. 자녀들 중에 말썽을 부리거나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이런 자녀라도 부모가 “잘할 수 있어!” 하며 믿어 주고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 주면 얼마든지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로 바뀔 수 있습니다. 부모의 믿음이 아이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자존감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고, 이러한 심리가 실제로도 학업 성적을 높인다고 합니다.
영혼을 갈무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생각 가운데 상대를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은 변화되기 어려울 것 같다.’ 하거나 ‘여전히 그 모습이구나.’ 하고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될 것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격려하며 끊임없이 기도해 주어야 하지요.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어떤 영혼이든지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 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가 마음에 있는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온갖 시련을 참는 자기와의 싸움이 ( )이라면, ( )는 것은 오래 참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리로 일군 후에 상대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참는 것을 말한다.
2. 사랑은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 했는데,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으려면 반드시 ( )이 있어야 한다.
3. ( )는 것은 믿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이뤄질 것을 바라게 된다.
● 알고 넘어갑시다!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을 통해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도시인 고린도 지방에 세워진 교회이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분쟁, 소송문제, 은사 나눔 문제, 부활 논쟁, 심지어 바울의 사도권까지 문제 삼았다. 또한 거짓 선지자가 들어와 훼방하며, 음행 같은 세상 문화가 들어와 교회를 더럽혔다. 빈부 격차에 제사 음식 먹는 것 가지고도 싸웠기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쓴 서신이 고린도전·후서이다.
2025-11-28
제48과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고전 13:6
읽을말씀 : 고전 13:6 | 외울말씀 : 요 15:14
교육목표 :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함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선진 국가일수록 정직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반면 후진국일수록 부정부패와 불의가 만연하다고 합니다. 불의는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고 개인의 삶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1.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불의한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요.
가령, 부유한 친구를 보았을 때 시기, 질투가 나서 ‘친구는 잘 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친구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이것이 악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잘나가던 친구가 사기를 당해서 부도가 났을 때, “잘산다고 뽐내더니 고소하다.”고 하면서 쾌재를 부른다면 이것은 불의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한 일에 동조하고 가담했다면 더 적극적으로 불의를 기뻐한 것이 되지요.
1) 일반적으로 불의한 경우
불의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불의라 여기는 ‘일반적인 불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옳지 않은 방법으로 재물이나 이익을 취하고 남을 속이거나 강제적으로 빼앗는 것들이지요.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의가 전혀 없지만 세상에는 남을 속이는 등 불의가 얼마나 많습니까. 역대하 19장 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말씀합니다.
사람의 눈은 가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은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라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수고의 대가 외에는 바라지 않지요.
2) 하나님 보실 때 불의한 경우
주 안에서의 불의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세상 법을 어기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며,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온갖 죄가 다 불의입니다. 불의는 마음의 악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온 죄이며, 죄 중에서도 특히 육체의 일에 해당합니다. 즉 마음에 있는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악이 다툼, 폭행, 사기, 살인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는 불의한 사람은 구원받기도 어렵다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즉 불의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 안에서 불의는 구원과 직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불의를 행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애통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기도해 주고 말씀대로 살도록 도와야지요. 그런데 ‘나도 적당히, 좀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다.’고 불의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아가 불의한 일에 동조하고 가담한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지요.
아무런 죄 없으신 예수님은 불의했던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벧전 3:18). 이런 큰 사랑을 깨닫는다면 결코 불의를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불의를 행하지 않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2.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란
1) ‘복음’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찾기 위해 사상과 철학, 학문을 탐구하며 여러 종교 교리에서 답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 6절에 이러한 모든 것을 불식시키고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나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했지요. 즉 참된 진리는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 지옥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지요. 따라서 삶의 목적을 알아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복음을 기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충성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는 이들이 더해가는 것을 기뻐하지요.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했습니다.
2)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선, 사랑, 공의 등 진리에 속한 것을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은 작은 선행을 보고도 기뻐하고 감동합니다. 또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송이꿀처럼 달다고 고백하며 늘 설교 말씀을 듣고 성경 보기를 즐겨합니다. 나아가 말씀대로 행하기를 기뻐합니다. 설령 애매히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하나님 말씀에 ‘섬기라, 이해하고 용서하라.’ 하셨으니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처럼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은 상대가 잘되면 함께 기뻐합니다. 시기, 질투하거나 ‘상대가 잘못되었으면….’ 하는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요. 불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애통해합니다. 또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변개하지 않는 마음, 진실함, 정직함 등 선의 마음을 좋아합니다. 선한 말과 행실을 기뻐하지요. 이러한 자녀들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혹여 자신을 볼 때 아직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모습이 있다 해도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노력하는 자체도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짝한 우리가 처음부터 진리만 기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음에 어둠과 비진리가 있기에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차츰차츰 변화되어 비진리의 마음을 온전히 벗으면서 진리만 기뻐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이 따르지요.
예를 들어, 초신자만 보더라도 예배드리는 것이 무조건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진리의 맛을 모릅니다. 피곤해하거나 마음이 다른 데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점점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함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행함은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말씀을 듣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성장할수록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결되고 충성하기에 힘쓰지요. 설령 진리와 함께 백 퍼센트 기뻐하지는 못한다 해도 저마다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기뻐하되 나아가 진리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주리고 목마르면 먹을 양식과 음료가 간절히 생각나듯이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도 이처럼 간절해야 신속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진리를 먹고 마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리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양식 삼고 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믿고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삶 가운데 늘 넘쳐나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악한 것을 ( )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 )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2.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불의를 사랑하여 멸망으로 간 아간
아간은 출애굽 2세대 인물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친히 목도하였다. 넘실거리는 요단 강물이 멎고, 견고한 여리고 성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는 것도 보았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에서 나오는 물건에는 일절 손대지 말라고 한 것도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외투와 번쩍이는 금덩이와 은을 보는 순간, 아간은 하나님 말씀도, 여호수아의 당부도 잊은 채 은밀히 감추어 두었다.
이러한 아간의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어이없게도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다.
결국 이 일로 아간의 불의가 드러났고 그와 그의 온 가족은 돌에 맞아 죽는다.
이 돌무더기가 쌓인 곳이 바로 저주의 상징인 아골 골짜기이다.
교육목표 :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함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선진 국가일수록 정직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반면 후진국일수록 부정부패와 불의가 만연하다고 합니다. 불의는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고 개인의 삶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1.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불의한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요.
가령, 부유한 친구를 보았을 때 시기, 질투가 나서 ‘친구는 잘 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친구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이것이 악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잘나가던 친구가 사기를 당해서 부도가 났을 때, “잘산다고 뽐내더니 고소하다.”고 하면서 쾌재를 부른다면 이것은 불의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한 일에 동조하고 가담했다면 더 적극적으로 불의를 기뻐한 것이 되지요.
1) 일반적으로 불의한 경우
불의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불의라 여기는 ‘일반적인 불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옳지 않은 방법으로 재물이나 이익을 취하고 남을 속이거나 강제적으로 빼앗는 것들이지요.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의가 전혀 없지만 세상에는 남을 속이는 등 불의가 얼마나 많습니까. 역대하 19장 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말씀합니다.
사람의 눈은 가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은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라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수고의 대가 외에는 바라지 않지요.
2) 하나님 보실 때 불의한 경우
주 안에서의 불의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세상 법을 어기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며,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온갖 죄가 다 불의입니다. 불의는 마음의 악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온 죄이며, 죄 중에서도 특히 육체의 일에 해당합니다. 즉 마음에 있는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악이 다툼, 폭행, 사기, 살인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는 불의한 사람은 구원받기도 어렵다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즉 불의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 안에서 불의는 구원과 직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불의를 행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애통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기도해 주고 말씀대로 살도록 도와야지요. 그런데 ‘나도 적당히, 좀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다.’고 불의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아가 불의한 일에 동조하고 가담한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지요.
아무런 죄 없으신 예수님은 불의했던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벧전 3:18). 이런 큰 사랑을 깨닫는다면 결코 불의를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불의를 행하지 않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2.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란
1) ‘복음’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찾기 위해 사상과 철학, 학문을 탐구하며 여러 종교 교리에서 답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 6절에 이러한 모든 것을 불식시키고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나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했지요. 즉 참된 진리는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 지옥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지요. 따라서 삶의 목적을 알아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복음을 기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충성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는 이들이 더해가는 것을 기뻐하지요.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했습니다.
2)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선, 사랑, 공의 등 진리에 속한 것을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은 작은 선행을 보고도 기뻐하고 감동합니다. 또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송이꿀처럼 달다고 고백하며 늘 설교 말씀을 듣고 성경 보기를 즐겨합니다. 나아가 말씀대로 행하기를 기뻐합니다. 설령 애매히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하나님 말씀에 ‘섬기라, 이해하고 용서하라.’ 하셨으니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처럼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은 상대가 잘되면 함께 기뻐합니다. 시기, 질투하거나 ‘상대가 잘못되었으면….’ 하는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요. 불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애통해합니다. 또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변개하지 않는 마음, 진실함, 정직함 등 선의 마음을 좋아합니다. 선한 말과 행실을 기뻐하지요. 이러한 자녀들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혹여 자신을 볼 때 아직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모습이 있다 해도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노력하는 자체도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짝한 우리가 처음부터 진리만 기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음에 어둠과 비진리가 있기에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차츰차츰 변화되어 비진리의 마음을 온전히 벗으면서 진리만 기뻐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이 따르지요.
예를 들어, 초신자만 보더라도 예배드리는 것이 무조건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진리의 맛을 모릅니다. 피곤해하거나 마음이 다른 데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점점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함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행함은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말씀을 듣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성장할수록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결되고 충성하기에 힘쓰지요. 설령 진리와 함께 백 퍼센트 기뻐하지는 못한다 해도 저마다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기뻐하되 나아가 진리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주리고 목마르면 먹을 양식과 음료가 간절히 생각나듯이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도 이처럼 간절해야 신속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진리를 먹고 마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리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양식 삼고 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믿고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삶 가운데 늘 넘쳐나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악한 것을 ( )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 )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2.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불의를 사랑하여 멸망으로 간 아간
아간은 출애굽 2세대 인물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친히 목도하였다. 넘실거리는 요단 강물이 멎고, 견고한 여리고 성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는 것도 보았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에서 나오는 물건에는 일절 손대지 말라고 한 것도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외투와 번쩍이는 금덩이와 은을 보는 순간, 아간은 하나님 말씀도, 여호수아의 당부도 잊은 채 은밀히 감추어 두었다.
이러한 아간의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어이없게도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다.
결국 이 일로 아간의 불의가 드러났고 그와 그의 온 가족은 돌에 맞아 죽는다.
이 돌무더기가 쌓인 곳이 바로 저주의 상징인 아골 골짜기이다.
2025-11-21
제47과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
고전 13:5
읽을말씀 : 고전 13:5 | 외울말씀 : 눅 6:45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하여 버림으로 영적인 참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잘사는 친구를 볼 때 시기, 질투가 나고 괜히 뽐내는 것 같아 밉기도 하고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그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친다면 이것이 바로 악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악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볼 때 하나님 뜻이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에 위배되는 악한 생각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경우
첫째로,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말다툼을 했습니다. 상대가 미운 나머지 ‘가다가 콱 걸려 넘어지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사이가 나쁘던 이웃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은근히 ‘잘됐다.’, ‘참 고소하다.’, ‘그럴 줄 알았어.’ 생각하기도 합니다. 혹은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내심 ‘시험을 못 봤으면’ 바랍니다.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결코 악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요. 내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항상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마음 안에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고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며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의 험담에 귀가 솔깃해진다면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부모를 헐뜯는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으며 당장 나무랄 것입니다. 혹여 상대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막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사실을 알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닌데도 남의 말이 궁금하고 솔깃해진다면 대개 험담하고 수군수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선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합니다. 또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남이 잘될 때 시기, 질투하지도 않으며 상대가 잘되고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상대를 판단 정죄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성도가 크리스천으로서 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오르겠습니까?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고 안 좋게 생각합니다. 좀 더 선하다면 ‘왜 저런 곳에 갈까?’ 의아해하다가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좋은 쪽으로 바꾸지요.
그러나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악한 생각 자체가 들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전해 듣는다 해도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지요. 야고보서 4장 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말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장으로서 판단하시기에 남을 판단하는 것은 악입니다. 설령 상대가 잘못했을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상대가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릴 길을 생각하지요.
영적인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할 뿐 아니라 상대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른길로 가도록 진리를 알려 주고 변화되도록 감동을 줍니다. 허물 많은 사람도 사랑하기에 어찌하든 믿어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하지요. 이처럼 판단 정죄하는 생각 자체가 없어야 누구를 만나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 뜻에 위배되는 모든 생각입니다.
단순히 상대방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나 악한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을 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양심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도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주님을 처음 영접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악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의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은 다 악이며 죄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그러면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둘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악’은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와 같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는 줄기와 잎, 열매입니다. 뿌리가 있으므로 줄기와 잎, 열매가 나오듯이 죄는 악에서 나오는 산물입니다. 즉 악은 땅속 깊숙이 자리 잡은 뿌리와 같이 마음 안의 ‘속성’입니다. 이 악이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했습니다(눅 6:45).
어떤 사람이 욕을 하며 가시 돋친 말과 함께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있는 미움이라는 악이 ‘욕’이나 ‘가시 돋친 말’, ‘폭력’이라는 행함 곧 죄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악이 있다고 반드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교양이 있거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절제한다면 죄를 짓지는 않지요.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 속의 악까지 다 버려야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압축하면 ‘사랑’이지요. 결국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이며 죄입니다. 하나님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만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악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설령 보거나 들어도 떠올리거나 되새기려 하지 말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 마음먹은 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집요하게 떠오를 때도 있지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기도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시지요. 일부러 보고 듣고 떠올리는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하며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악한 일에 결코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이서 1장 10~11절에 보면 “누구든지 이 교훈(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했습니다. 철저히 악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이지요.
사람은 타고난 죄성과 성장하면서 보고 들은 비진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 죄성과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려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죄성과 비진리를 버리는 데에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진리보다 비진리가 더 익숙하고, 비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버리기는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악은 무익합니다. 우리가 악을 심으면 재앙을 거둘 뿐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에게 질병이 오거나 사고를 겪고 가난과 가정불화로 근심 속에 살아가는 등 이런저런 문제들도 결국 자신이 심은 악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을 미워하면서 자신의 영혼에 두 가지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악한 생각을 물리치고 선한 생각, 영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행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얻을 수 있지요. 또한 기도하면서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곱씹어볼 때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에 마음의 악을 버릴 수 있지요. 이처럼 말씀과 기도로 신속히 악을 버림으로 마음에 평안을 얻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① 상대가 ( )되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② 상대를 ( ) ( )하는 생각이다.
③ 하나님 ( )에 ( )되는 모든 생각이다.
2.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3.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본성에는 저마다 부모의 기를 통해 받은 악이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다가 극한 상황에 부딪히면 드러나게 된다.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장 안 넘을 사람없다”는 속담처럼 온전히 성결을 이루기 전에는 극한 상황에 몰리면 평소 자신도 모르는 악이 드러나는 것이다.
파리 똥이 아무리 작아도 똥인 것처럼 설령 죄를 짓지 않는다 해도 흠도 티도 없으신 온전한 하나님에 비할 때 온전하지 않은 것이 다 악의 모양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신 것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하여 버림으로 영적인 참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잘사는 친구를 볼 때 시기, 질투가 나고 괜히 뽐내는 것 같아 밉기도 하고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그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친다면 이것이 바로 악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악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볼 때 하나님 뜻이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에 위배되는 악한 생각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경우
첫째로,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말다툼을 했습니다. 상대가 미운 나머지 ‘가다가 콱 걸려 넘어지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사이가 나쁘던 이웃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은근히 ‘잘됐다.’, ‘참 고소하다.’, ‘그럴 줄 알았어.’ 생각하기도 합니다. 혹은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내심 ‘시험을 못 봤으면’ 바랍니다.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결코 악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요. 내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항상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마음 안에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고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며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의 험담에 귀가 솔깃해진다면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부모를 헐뜯는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으며 당장 나무랄 것입니다. 혹여 상대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막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사실을 알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닌데도 남의 말이 궁금하고 솔깃해진다면 대개 험담하고 수군수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선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합니다. 또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남이 잘될 때 시기, 질투하지도 않으며 상대가 잘되고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상대를 판단 정죄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성도가 크리스천으로서 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오르겠습니까?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고 안 좋게 생각합니다. 좀 더 선하다면 ‘왜 저런 곳에 갈까?’ 의아해하다가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좋은 쪽으로 바꾸지요.
그러나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악한 생각 자체가 들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전해 듣는다 해도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지요. 야고보서 4장 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말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장으로서 판단하시기에 남을 판단하는 것은 악입니다. 설령 상대가 잘못했을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상대가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릴 길을 생각하지요.
영적인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할 뿐 아니라 상대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른길로 가도록 진리를 알려 주고 변화되도록 감동을 줍니다. 허물 많은 사람도 사랑하기에 어찌하든 믿어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하지요. 이처럼 판단 정죄하는 생각 자체가 없어야 누구를 만나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 뜻에 위배되는 모든 생각입니다.
단순히 상대방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나 악한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을 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양심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도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주님을 처음 영접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악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의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은 다 악이며 죄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그러면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둘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악’은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와 같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는 줄기와 잎, 열매입니다. 뿌리가 있으므로 줄기와 잎, 열매가 나오듯이 죄는 악에서 나오는 산물입니다. 즉 악은 땅속 깊숙이 자리 잡은 뿌리와 같이 마음 안의 ‘속성’입니다. 이 악이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했습니다(눅 6:45).
어떤 사람이 욕을 하며 가시 돋친 말과 함께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있는 미움이라는 악이 ‘욕’이나 ‘가시 돋친 말’, ‘폭력’이라는 행함 곧 죄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악이 있다고 반드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교양이 있거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절제한다면 죄를 짓지는 않지요.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 속의 악까지 다 버려야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압축하면 ‘사랑’이지요. 결국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이며 죄입니다. 하나님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만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악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설령 보거나 들어도 떠올리거나 되새기려 하지 말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 마음먹은 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집요하게 떠오를 때도 있지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기도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시지요. 일부러 보고 듣고 떠올리는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하며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악한 일에 결코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이서 1장 10~11절에 보면 “누구든지 이 교훈(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했습니다. 철저히 악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이지요.
사람은 타고난 죄성과 성장하면서 보고 들은 비진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 죄성과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려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죄성과 비진리를 버리는 데에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진리보다 비진리가 더 익숙하고, 비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버리기는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악은 무익합니다. 우리가 악을 심으면 재앙을 거둘 뿐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에게 질병이 오거나 사고를 겪고 가난과 가정불화로 근심 속에 살아가는 등 이런저런 문제들도 결국 자신이 심은 악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을 미워하면서 자신의 영혼에 두 가지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악한 생각을 물리치고 선한 생각, 영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행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얻을 수 있지요. 또한 기도하면서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곱씹어볼 때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에 마음의 악을 버릴 수 있지요. 이처럼 말씀과 기도로 신속히 악을 버림으로 마음에 평안을 얻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① 상대가 ( )되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② 상대를 ( ) ( )하는 생각이다.
③ 하나님 ( )에 ( )되는 모든 생각이다.
2.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3.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본성에는 저마다 부모의 기를 통해 받은 악이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다가 극한 상황에 부딪히면 드러나게 된다.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장 안 넘을 사람없다”는 속담처럼 온전히 성결을 이루기 전에는 극한 상황에 몰리면 평소 자신도 모르는 악이 드러나는 것이다.
파리 똥이 아무리 작아도 똥인 것처럼 설령 죄를 짓지 않는다 해도 흠도 티도 없으신 온전한 하나님에 비할 때 온전하지 않은 것이 다 악의 모양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신 것이다.
2025-11-14
제46과추수감사제
출애굽기 23:14~17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4~17 | 외울말씀 : 출애굽기 23:16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성경적인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와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그러므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셔서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고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됩니다.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제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대하 20:20 이하).
또한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궁핍한 중에도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귀한 음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야에게 심었습니다. 먹을 것이 금보다 귀한 때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심으니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와 그의 가족과 엘리야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을 보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겼으므로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 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 행함있는 감사를 심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아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와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그러므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셔서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고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됩니다.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제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대하 20:20 이하).
또한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궁핍한 중에도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귀한 음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야에게 심었습니다. 먹을 것이 금보다 귀한 때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심으니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와 그의 가족과 엘리야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을 보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겼으므로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 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 행함있는 감사를 심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아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3.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감사의 조건들을 써 보세요.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이러한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여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승리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성경적인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와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그러므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셔서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고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됩니다.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제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대하 20:20 이하).
또한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궁핍한 중에도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귀한 음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야에게 심었습니다. 먹을 것이 금보다 귀한 때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심으니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와 그의 가족과 엘리야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을 보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겼으므로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 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 행함있는 감사를 심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아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와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그러므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셔서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고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됩니다.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제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대하 20:20 이하).
또한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궁핍한 중에도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귀한 음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야에게 심었습니다. 먹을 것이 금보다 귀한 때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심으니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와 그의 가족과 엘리야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을 보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겼으므로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 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 행함있는 감사를 심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아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3.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감사의 조건들을 써 보세요.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이러한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여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승리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2025-11-07
제45과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는 것
고린도전서 13:5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5 | 외울말씀 : 약 1:20 | 참고 말씀: 고전 10:31
교육목표 :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드는 성냄을 버리고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희생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한다.
현대 사회는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갓난아이들이 먹는 분유에 유해성 화학물질을 첨가하는가 하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원천 기술을 빼돌려 막대한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1.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령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갔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불편합니다. 반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해당합니까?
또 직장에서 자기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설령 자기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기쁨으로 따라 주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 사람의 마음에 얼마큼 영적인 사랑이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현상이 다릅니다.
만일 의견 대립이 심해져서 다툼이 생기고 화평이 깨진다면 이는 바로 자기 입장만 고집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자꾸 부딪치고 마음에 상처만 더 깊어지지요. 서로 양보하고 상대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는 일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므로 화평이 깨집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면 늘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1) 사랑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한 아브라함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범사에 내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한 사람으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올 때 조카 롯이 함께했는데, 아브라함과 함께함으로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아 가축이 심히 많아졌지요. 어찌나 많았던지 가축에게 먹일 물이 부족하여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화평이 깨지기를 원치 않았기에 롯에게 땅을 택하여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목축업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풀과 물입니다. 가나안 지경은 물과 풀이 넉넉한 곳이 많지 않으니 땅을 양보한다는 것은 생존권을 양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롯을 사랑했기에 배려한 것입니다. 이런 삼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롯은 물이 많고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해 떠납니다. 자신의 유익을 좇아 떠나는 롯을 볼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불편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카가 더 좋은 땅을 가질 수 있어 행복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한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하시며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주변 나라 왕들의 예우를 받을 만큼 엄청난 거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으며 기쁨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이 따릅니다.
2)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그러면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성령을 의뢰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다 참사랑을 이루면 각 상황마다 선의 지혜가 풍성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지요. 이처럼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져서 마음껏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지 않는 이웃이나 가족에게 사랑받게 되지요.
우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게 되면 화평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상대의 유익을 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나를 힘들게 하고 자신의 유익만 좇는 사람, 나에게 피해가 되는 사람, 비진리를 행하고 노상 악한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지요?
그런 경우에는 피해 버리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사랑으로 희생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될 때 영적인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들며,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냄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바로 미움과 성냄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성내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표정만 보고 ‘화가 났구나.’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 의분과 성냄의 차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일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은 성전 뜰에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팔았지요. 온유하신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고 돌변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지요.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이 혈기가 대단하시네? 화를 내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분을 내신 것이지요. 비록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는 결국 공의로 사랑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분을 내신 것도 영혼들을 깨우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냄과 의분은 전혀 다릅니다. 그만큼 성결되어 죄가 없을 때 의분 또는 책망을 통해서도 영혼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2) 성내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성내는 이유는 먼저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입니다. 저마다 성장한 환경이나 배움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과 생각이 다르고 교양이 다르며 판단 기준이 다른데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니 감정이 나지요. 또한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성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앞서거나 나은 위치에 있으면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요. 이 외에도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욕설을 듣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화를 냅니다.
사람들은 성내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 나쁜 감정부터 일어납니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먼저 감정을 자극하고 결국 성내는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흔히 ‘감정이 상한다’는 단계가 바로 성냄의 전초 단계입니다. 우리가 성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해서 혈기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고전 3:16).
그러면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절제를 잘해서 꾹 눌러 참으면 될까요?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력이 생겨 튕겨져 나오듯이 화를 눌러 참는 것이 순간의 위기는 모면한다 해도 언젠가는 폭발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성내지 않으려면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마음을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우리가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3.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 )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한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 )과 ( )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화가 날 때’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서재에는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매우 화가 나면 백까지 세라.”는 글이 있었다고 한다. 화가 날 때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찬찬히 생각해 보자. 그러면 한순간 참지 못해 후회할 일이나 부끄럼 당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인내하다 보면 나중에는 성나게 하는 감정까지 차츰 버려진다.
예전에는 10번 화내던 것이 9번, 8번 점점 줄어들어 아무리 화가 날 상황이 되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 12:16)
교육목표 :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드는 성냄을 버리고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희생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한다.
현대 사회는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갓난아이들이 먹는 분유에 유해성 화학물질을 첨가하는가 하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원천 기술을 빼돌려 막대한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1.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령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갔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불편합니다. 반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해당합니까?
또 직장에서 자기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설령 자기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기쁨으로 따라 주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 사람의 마음에 얼마큼 영적인 사랑이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현상이 다릅니다.
만일 의견 대립이 심해져서 다툼이 생기고 화평이 깨진다면 이는 바로 자기 입장만 고집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자꾸 부딪치고 마음에 상처만 더 깊어지지요. 서로 양보하고 상대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는 일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므로 화평이 깨집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면 늘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1) 사랑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한 아브라함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범사에 내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한 사람으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올 때 조카 롯이 함께했는데, 아브라함과 함께함으로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아 가축이 심히 많아졌지요. 어찌나 많았던지 가축에게 먹일 물이 부족하여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화평이 깨지기를 원치 않았기에 롯에게 땅을 택하여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목축업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풀과 물입니다. 가나안 지경은 물과 풀이 넉넉한 곳이 많지 않으니 땅을 양보한다는 것은 생존권을 양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롯을 사랑했기에 배려한 것입니다. 이런 삼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롯은 물이 많고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해 떠납니다. 자신의 유익을 좇아 떠나는 롯을 볼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불편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카가 더 좋은 땅을 가질 수 있어 행복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한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하시며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주변 나라 왕들의 예우를 받을 만큼 엄청난 거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으며 기쁨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이 따릅니다.
2)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그러면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성령을 의뢰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다 참사랑을 이루면 각 상황마다 선의 지혜가 풍성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지요. 이처럼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져서 마음껏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지 않는 이웃이나 가족에게 사랑받게 되지요.
우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게 되면 화평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상대의 유익을 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나를 힘들게 하고 자신의 유익만 좇는 사람, 나에게 피해가 되는 사람, 비진리를 행하고 노상 악한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지요?
그런 경우에는 피해 버리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사랑으로 희생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될 때 영적인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들며,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냄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바로 미움과 성냄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성내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표정만 보고 ‘화가 났구나.’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 의분과 성냄의 차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일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은 성전 뜰에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팔았지요. 온유하신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고 돌변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지요.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이 혈기가 대단하시네? 화를 내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분을 내신 것이지요. 비록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는 결국 공의로 사랑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분을 내신 것도 영혼들을 깨우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냄과 의분은 전혀 다릅니다. 그만큼 성결되어 죄가 없을 때 의분 또는 책망을 통해서도 영혼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2) 성내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성내는 이유는 먼저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입니다. 저마다 성장한 환경이나 배움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과 생각이 다르고 교양이 다르며 판단 기준이 다른데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니 감정이 나지요. 또한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성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앞서거나 나은 위치에 있으면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요. 이 외에도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욕설을 듣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화를 냅니다.
사람들은 성내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 나쁜 감정부터 일어납니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먼저 감정을 자극하고 결국 성내는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흔히 ‘감정이 상한다’는 단계가 바로 성냄의 전초 단계입니다. 우리가 성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해서 혈기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고전 3:16).
그러면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절제를 잘해서 꾹 눌러 참으면 될까요?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력이 생겨 튕겨져 나오듯이 화를 눌러 참는 것이 순간의 위기는 모면한다 해도 언젠가는 폭발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성내지 않으려면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마음을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우리가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3.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 )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한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 )과 ( )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화가 날 때’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서재에는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매우 화가 나면 백까지 세라.”는 글이 있었다고 한다. 화가 날 때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찬찬히 생각해 보자. 그러면 한순간 참지 못해 후회할 일이나 부끄럼 당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인내하다 보면 나중에는 성나게 하는 감정까지 차츰 버려진다.
예전에는 10번 화내던 것이 9번, 8번 점점 줄어들어 아무리 화가 날 상황이 되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 12:16)
2025-11-02
제0과열 재앙(2) - 지팡이가 뱀이 되다
출 7:10-13
읽을말씀 : 출 7:10-13 | 외울말씀 : 이수진 목사
교육목표 : 이 시간은 본격적인 열 재앙을 설명하기에 앞서 “지팡이가 뱀이 된 이적”이 나타남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환난, 재앙, 연단, 시험의 차이와 의미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은 재앙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신앙인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시험이나 환난, 연단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요. 로마서 5장 3-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진리대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 얼마큼 믿음이 있느냐에 따라 재앙이라 할 수도 있고 연단 혹은 시험, 환난이라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믿음이 있는 사람이 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수 없으므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환난’이라고 한다면, 더 나아가 믿음마저도 저버리고 비진리 가운데 행할 때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비록 온전히 말씀 가운데 살지 못한다 해도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마음에 있는 죄의 속성을 버리기까지 싸워나가는 과정을 ‘연단’이라고 하지요.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나가는 과정 중에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연단입니다. ‘시험’은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지 영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작업과 같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연단과 시험이 오는 것이요, 하나님을 노엽게 함으로 오는 것이 환난과 재앙입니다. 그중에서도 재앙이란 짐짓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만큼 재앙이 임하지요. 재앙이 임했는데도 여전히 돌이키지 않고 악을 행하면 애굽의 열 재앙처럼 더 큰 재앙이 임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재앙은 신속히 물러가게 됩니다.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 재앙을 당한다 해도 사람에 따라 마음과 행함이 다른 것을 봅니다. 바람직한 모습은, 재앙을 당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재앙이 거두어지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지요.
그런데 다른 모습은 “나는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는데 왜 이런 재앙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니 더 큰 재앙이 임하게 되지요. 사람의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단단하여 아무리 복음을 전하여도 마음 문을 열지 않지요.
세상 사람만 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고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할 뿐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서 머리로 알기는 하지만 행함이 없으니 죽은 믿음에 불과하지요. 시간이 지나다가 재앙이라도 만나면 자신은 잘못이 없다며 원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앙이 임했다면 반드시 합당치 못한 것이 있음을 깨닫고, 돌이킴으로 신속히 재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지팡이가 뱀이 된 이적
출애굽기 5장 1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라고 모세는 애굽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지만 바로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출애굽기 5장 2절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 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하지요.
도리어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을러서 딴생각을 품는다는 억지 이유를 만들어 더 심한 고역으로 학대합니다. 평소 짚을 주어 벽돌을 만들게 하였으나 이후로는 짚도 주지 않은 채 벽돌을 전과 동일하게 만들라고 명합니다. 짚을 주어도 노동량을 채우기 어려운 상황에서 짚까지 주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의 성품이 얼마나 완악한지 알 수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고 이적을 베풀어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십니다. 바로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지요. 출애굽기 7장 10절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된지라” 모세를 통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팡이를 들어 뱀을 만드심으로 바로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신 이유
뱀은 영적으로 사단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신 것일까요? 모세가 서 있는 곳은 애굽 땅 바로의 왕궁이요, 이는 세상, 원수 마귀 사단에 속한 것이므로 이를 상징하기 위해 뱀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하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사단의 역사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지요.
바로 왕은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 없으므로 사단을 의미하는 뱀을 등장시켜 깨우침을 주십니다. 사단의 역사가 따를 것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이후에 피의 재앙이나 개구리의 재앙, 이의 재앙도 모두 사단의 역사로 인함입니다.
여기서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을 우리의 삶에 대입하면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문제가 오는데, 너무 크지 않으므로 느낄 듯 말 듯 우연으로 돌릴 수 있는 일들이 생기는 단계입니다. 아직 재앙의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경고입니다. 이 사건과, 이어지는 이적을 베풀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행한 몇몇 이적을 애굽 술객들도 나타내지요. 모세를 대신하여 아론이 애굽 왕 앞에서 지팡이를 던지자, 뱀이 되었습니다. 이에 왕은 애굽의 박사와 박수들을 불렀는데 이들도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습니다.
2) 술객들이 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서 그렇게 할 수가 있었는데, 술객들은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다음에 설명할 피의 재앙에도 모세가 지팡이로 하수를 치니 물이 피로 변했는데 애굽 술객들도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모세가 개구리를 불러들이니 술객들도 그렇게 하였지요. 그들은 특별히 뽑힌 사람들로서 하나의 벼슬이었으며 그 직업은 조상 대대로 물려졌기에 재질을 타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전문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에 그 능력이 대단했고 더구나 그들은 영적으로 자신을 개발하여 악한 영들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것은 그 당시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도 세계적인 마술사들의 공연을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을 통과하기도합니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이 사라지게 하는 것도 있었지요. 인도의 요가를 오래 수련한 사람 중에는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서 잠을 자거나 자기 몸보다 심히 작은 통속에 몸을 넣는 묘기를 보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눈속임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수련을 통해 터득한 기법으로 놀라우리만큼 신기한 묘기를 보이지요.
고대는 오늘날 마술하는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한 영들과 접할 수 있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무당 중에 귀신의 영을 접해서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뛰고 춤을 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도 상하지 않지요. 바로 술객들도 악의 영들에 접해서 갖가지 능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수련한 것과 악한 영의 도움을 받은 술객들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능력의 한계까지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악한 영의 권세 안에서만 가능하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 전국의 물이 다 피가 되게 했지만, 술객들은 왕궁의 많은 하수 중 하나를 택해서 피로 변하게 했을 뿐입니다. 술객들이 능력이 있다면 모세가 저주한 것을 해결하거나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는 할 수 없었지요. 또한 모세는 티끌로 이를 만들었는데 술객들은 하지 못하고 그 이후에 나타내는 재앙은 따라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3. 신앙 안에서 우연은 없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들자, 바로는 ‘하나님이 정말 있는가 보다.’ 하다가 애굽의 술객들도 뱀을 만드는 것을 보니 다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술객들의 뱀이 아론의 지팡이로 만든 뱀에게 먹혔지만, 우연의 일치로 돌려버리고 마음을 더 강퍅하게 했지요.
신앙 안에서는 우연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초신자들이 이 제단에 나타난 권능의 역사로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사단은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 해결 받은 것이 ‘우연이었나? 다른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았을까?’ 하며 우연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은혜를 받고서도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세상으로 향하면 전에 체험했던 일이나, 굳게 믿었던 믿음이 의심되거나 우연의 일치로 돌리게 됩니다.
축복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도 하셨지만 내 힘, 내 지식, 내 경험도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지요.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리지 않을 때, 믿음이 조금 남아 있다 할지라도 확고한 믿음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지요.
이렇게 되면 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역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수밖에 없고, 옛날에 해결 받았던 문제가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치료받은 질병이 재발하거나 전보다 더 심한 병이 들 수도 있지요. 사업이 번창하는가 싶더니 더 심하게 망해 버리기도 하지요. 하나님께 응답받은 것을 우연의 일치로 돌림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차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니 문제가 다시 생기고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악한 영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주관자는 원수 마귀요,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이 더 쉽고, 유익처럼 보인다 해도 우리는 결코 어둠을 좇을 수 없습니다. 당장 편리를 좇아 악을 행하고 어둠의 길을 가면 결국 재앙이요, 사망이기 때문이지요. 지혜로운 성도들은 참된 복의 길, 빛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크고 놀라운 축복을 항상 받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이 시간은 본격적인 열 재앙을 설명하기에 앞서 “지팡이가 뱀이 된 이적”이 나타남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환난, 재앙, 연단, 시험의 차이와 의미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은 재앙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신앙인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시험이나 환난, 연단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요. 로마서 5장 3-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진리대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 얼마큼 믿음이 있느냐에 따라 재앙이라 할 수도 있고 연단 혹은 시험, 환난이라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믿음이 있는 사람이 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수 없으므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환난’이라고 한다면, 더 나아가 믿음마저도 저버리고 비진리 가운데 행할 때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비록 온전히 말씀 가운데 살지 못한다 해도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마음에 있는 죄의 속성을 버리기까지 싸워나가는 과정을 ‘연단’이라고 하지요.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나가는 과정 중에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연단입니다. ‘시험’은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지 영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작업과 같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연단과 시험이 오는 것이요, 하나님을 노엽게 함으로 오는 것이 환난과 재앙입니다. 그중에서도 재앙이란 짐짓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만큼 재앙이 임하지요. 재앙이 임했는데도 여전히 돌이키지 않고 악을 행하면 애굽의 열 재앙처럼 더 큰 재앙이 임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재앙은 신속히 물러가게 됩니다.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 재앙을 당한다 해도 사람에 따라 마음과 행함이 다른 것을 봅니다. 바람직한 모습은, 재앙을 당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재앙이 거두어지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지요.
그런데 다른 모습은 “나는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는데 왜 이런 재앙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니 더 큰 재앙이 임하게 되지요. 사람의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단단하여 아무리 복음을 전하여도 마음 문을 열지 않지요.
세상 사람만 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고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할 뿐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서 머리로 알기는 하지만 행함이 없으니 죽은 믿음에 불과하지요. 시간이 지나다가 재앙이라도 만나면 자신은 잘못이 없다며 원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앙이 임했다면 반드시 합당치 못한 것이 있음을 깨닫고, 돌이킴으로 신속히 재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지팡이가 뱀이 된 이적
출애굽기 5장 1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라고 모세는 애굽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지만 바로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출애굽기 5장 2절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 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하지요.
도리어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을러서 딴생각을 품는다는 억지 이유를 만들어 더 심한 고역으로 학대합니다. 평소 짚을 주어 벽돌을 만들게 하였으나 이후로는 짚도 주지 않은 채 벽돌을 전과 동일하게 만들라고 명합니다. 짚을 주어도 노동량을 채우기 어려운 상황에서 짚까지 주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의 성품이 얼마나 완악한지 알 수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고 이적을 베풀어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십니다. 바로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지요. 출애굽기 7장 10절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된지라” 모세를 통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팡이를 들어 뱀을 만드심으로 바로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신 이유
뱀은 영적으로 사단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신 것일까요? 모세가 서 있는 곳은 애굽 땅 바로의 왕궁이요, 이는 세상, 원수 마귀 사단에 속한 것이므로 이를 상징하기 위해 뱀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하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사단의 역사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지요.
바로 왕은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 없으므로 사단을 의미하는 뱀을 등장시켜 깨우침을 주십니다. 사단의 역사가 따를 것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이후에 피의 재앙이나 개구리의 재앙, 이의 재앙도 모두 사단의 역사로 인함입니다.
여기서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을 우리의 삶에 대입하면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문제가 오는데, 너무 크지 않으므로 느낄 듯 말 듯 우연으로 돌릴 수 있는 일들이 생기는 단계입니다. 아직 재앙의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경고입니다. 이 사건과, 이어지는 이적을 베풀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행한 몇몇 이적을 애굽 술객들도 나타내지요. 모세를 대신하여 아론이 애굽 왕 앞에서 지팡이를 던지자, 뱀이 되었습니다. 이에 왕은 애굽의 박사와 박수들을 불렀는데 이들도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습니다.
2) 술객들이 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서 그렇게 할 수가 있었는데, 술객들은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다음에 설명할 피의 재앙에도 모세가 지팡이로 하수를 치니 물이 피로 변했는데 애굽 술객들도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모세가 개구리를 불러들이니 술객들도 그렇게 하였지요. 그들은 특별히 뽑힌 사람들로서 하나의 벼슬이었으며 그 직업은 조상 대대로 물려졌기에 재질을 타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전문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에 그 능력이 대단했고 더구나 그들은 영적으로 자신을 개발하여 악한 영들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것은 그 당시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도 세계적인 마술사들의 공연을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을 통과하기도합니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이 사라지게 하는 것도 있었지요. 인도의 요가를 오래 수련한 사람 중에는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서 잠을 자거나 자기 몸보다 심히 작은 통속에 몸을 넣는 묘기를 보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눈속임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수련을 통해 터득한 기법으로 놀라우리만큼 신기한 묘기를 보이지요.
고대는 오늘날 마술하는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한 영들과 접할 수 있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무당 중에 귀신의 영을 접해서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뛰고 춤을 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도 상하지 않지요. 바로 술객들도 악의 영들에 접해서 갖가지 능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수련한 것과 악한 영의 도움을 받은 술객들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능력의 한계까지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악한 영의 권세 안에서만 가능하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 전국의 물이 다 피가 되게 했지만, 술객들은 왕궁의 많은 하수 중 하나를 택해서 피로 변하게 했을 뿐입니다. 술객들이 능력이 있다면 모세가 저주한 것을 해결하거나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는 할 수 없었지요. 또한 모세는 티끌로 이를 만들었는데 술객들은 하지 못하고 그 이후에 나타내는 재앙은 따라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3. 신앙 안에서 우연은 없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들자, 바로는 ‘하나님이 정말 있는가 보다.’ 하다가 애굽의 술객들도 뱀을 만드는 것을 보니 다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술객들의 뱀이 아론의 지팡이로 만든 뱀에게 먹혔지만, 우연의 일치로 돌려버리고 마음을 더 강퍅하게 했지요.
신앙 안에서는 우연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초신자들이 이 제단에 나타난 권능의 역사로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사단은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 해결 받은 것이 ‘우연이었나? 다른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았을까?’ 하며 우연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은혜를 받고서도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세상으로 향하면 전에 체험했던 일이나, 굳게 믿었던 믿음이 의심되거나 우연의 일치로 돌리게 됩니다.
축복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도 하셨지만 내 힘, 내 지식, 내 경험도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지요.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리지 않을 때, 믿음이 조금 남아 있다 할지라도 확고한 믿음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지요.
이렇게 되면 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역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수밖에 없고, 옛날에 해결 받았던 문제가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치료받은 질병이 재발하거나 전보다 더 심한 병이 들 수도 있지요. 사업이 번창하는가 싶더니 더 심하게 망해 버리기도 하지요. 하나님께 응답받은 것을 우연의 일치로 돌림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차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니 문제가 다시 생기고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악한 영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주관자는 원수 마귀요,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이 더 쉽고, 유익처럼 보인다 해도 우리는 결코 어둠을 좇을 수 없습니다. 당장 편리를 좇아 악을 행하고 어둠의 길을 가면 결국 재앙이요, 사망이기 때문이지요. 지혜로운 성도들은 참된 복의 길, 빛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크고 놀라운 축복을 항상 받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