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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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31
제44과사랑은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는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잠언 16:18 | 참고 말씀: 야고보서 4:10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과 무례한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철저히 버리게 한다.
세계 최대의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1912년 4월 첫 출항을 하였습니다.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항해사는 해안 통제소로부터 ‘빙산 주의’라는 무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무시해 버리고 나중에서야 선장에게 “빙산이 있다는 무전을 받았는데 이 배가 빙산 따위에 눈 깜짝하겠습니까?”라고 했지요.
이때 선장은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어찌할 수 없을 걸세. 항해를 계속해!”라고 명령했습니다. 얼마 못 가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탑승객 2천2백여 명 중 1천5백여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빚어졌지요. 이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인간의 교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1.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하지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해 주어도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고 귀찮아합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이 생기고 자기가 옳다며 혈기를 내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데도 잘 모르지요. 교만하면 자신이 틀려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주장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의 확신이 있다 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육적인 교만과 영적인 교만
교만은 크게 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눈에 띄게 자신을 뽐내고, 남을 무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을 육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를 알고 버리기 위해 노력하면 비교적 쉽게 버려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교만은 스스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말씀을 들어 많이 압니다. 직분과 사명을 받아 위치가 높아지지요. 그러니 자신이 아는 말씀을 마음에 이룬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상대를 지적하고 판단, 정죄하면서도 자신은 진리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하지요. 마음이 높아지니 꼭 지켜야 할 절차도 무시해 버립니다. 명백히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인데도 ‘나는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괜찮다.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지요. 이처럼 높아진 마음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즉 낮아지면 주님께서 높여 주시지요.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썩지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양에 이르러 생명의 보고(寶庫)를 이룹니다. 여러분은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지극히 큰 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식사 매너, 대화 매너, 전화받는 매너, 공공장소에서의 매너 등 우리의 생활 속에는 다양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지요. 몸가짐이 바르고 때와 장소에 맞는 언행은 상대에게 호감을 주며 분위기를 쇄신시킵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되어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며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게 됩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간에도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모르지요.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 앞에 무례를 범하는 것일까요?
가령, 예배 시간에 좁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나 상사 앞에서 조는 것도 무례한데 하나님 앞에 존다는 것은 큰 실례이지요. 또 예배 시간에 대화하거나 딴생각을 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경우를 빼고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찬양이나 기도 시간은 물론 헌금이나 광고 시간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람들과의 약속도 늦으면 민망한데 예배에 지각한다는 것은 너무 불손한 행동이지요.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입니다. 이 밖에도 술 담배를 하고 예배드리거나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 껌을 씹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지요.
예배에 나올 때 몸가짐도 중요합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 그대로 아무렇게나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복장은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에티켓입니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바로 오는 경우는 예배 시간에 맞춰 서두르다 보면 작업복 차림으로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바쁜 일과 중에도 어찌하든 예배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상대가 기도하고 있는데 다급한 일로 툭툭 쳐서 기도를 중단시킨다면 윗사람과 대화하는데 불쑥 끼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또 기도하는데 누가 자신을 부른다고 곧바로 멈추는 것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는 것이지요. 마무리 기도까지 마친 후 응수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성전에서도 무례히 행하는 일들이 빈번합니다. 성전은 예배실뿐 아니라, 마당과 부속 시설 등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큰소리로 다투거나 사업이나 연예인, 드라마, 오락 등 세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물을 함부로 다루어 상하게 하거나 헌금봉투를 임의로 사용해서도 안 되지요. 성전 부속 사무실에서 인터넷 결제를 하고 물건을 받는 것 역시 명백한 매매입니다. 교회 마당에서 바자회 같은 행사를 여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무례한 행동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도 무례를 잘 범하는 이유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밤늦게 전화를 한다거나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장시간 붙들고 있다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또 약속시간에 늦는 것, 남의 집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내 편에서는 친해서라고 여기지만 상대는 다를 수 있지요.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 해서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또는 절친한 친구에게 예의 없이 대하다 보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 쉽게 반말을 하거나 무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는 불쾌감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 사이에도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세상의 법과 질서도 잘 지켜서 무례히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침을 뱉고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것도 무례하지요.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더욱 말과 행실에 본이 되어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체의 결여 속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사이에 무례히 행치는 않는지 자신을 체크해 보세요.
□ 예배시간이나 다니엘철야 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한다.
□ 성전에서 드라마나 연예인, 직장, 사업터 이야기를 한다.
□ 예배시간에 지각하거나 시간에 임박해 헐레벌떡 온다.
□ 헌금봉투의 용도 외에 설교 말씀을 적거나 메모한다.
□ 축도나 주기도문이 끝나기 전에 나간다.
□ 붐비는 식당에서 새치기를 한다.
□ 친하다고 밤늦게 전화를 스스럼없이 한다.
□ 누가 안 보니까 교통법규를 어긴다.
□ 아무에게나 쉽게 반말을 한다.
□ 약속시간을 종종 어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육체의 결여’란?
사람이 성장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함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통틀어 일컫는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지 못하면 지적인 능력, 행동 능력이 결여되거나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많이 동떨어진 감정 상태를 느낀다.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과 무례한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철저히 버리게 한다.
세계 최대의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1912년 4월 첫 출항을 하였습니다.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항해사는 해안 통제소로부터 ‘빙산 주의’라는 무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무시해 버리고 나중에서야 선장에게 “빙산이 있다는 무전을 받았는데 이 배가 빙산 따위에 눈 깜짝하겠습니까?”라고 했지요.
이때 선장은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어찌할 수 없을 걸세. 항해를 계속해!”라고 명령했습니다. 얼마 못 가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탑승객 2천2백여 명 중 1천5백여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빚어졌지요. 이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인간의 교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1.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하지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해 주어도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고 귀찮아합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이 생기고 자기가 옳다며 혈기를 내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데도 잘 모르지요. 교만하면 자신이 틀려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주장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의 확신이 있다 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육적인 교만과 영적인 교만
교만은 크게 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눈에 띄게 자신을 뽐내고, 남을 무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을 육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를 알고 버리기 위해 노력하면 비교적 쉽게 버려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교만은 스스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말씀을 들어 많이 압니다. 직분과 사명을 받아 위치가 높아지지요. 그러니 자신이 아는 말씀을 마음에 이룬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상대를 지적하고 판단, 정죄하면서도 자신은 진리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하지요. 마음이 높아지니 꼭 지켜야 할 절차도 무시해 버립니다. 명백히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인데도 ‘나는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괜찮다.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지요. 이처럼 높아진 마음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즉 낮아지면 주님께서 높여 주시지요.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썩지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양에 이르러 생명의 보고(寶庫)를 이룹니다. 여러분은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지극히 큰 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식사 매너, 대화 매너, 전화받는 매너, 공공장소에서의 매너 등 우리의 생활 속에는 다양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지요. 몸가짐이 바르고 때와 장소에 맞는 언행은 상대에게 호감을 주며 분위기를 쇄신시킵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되어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며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게 됩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간에도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모르지요.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 앞에 무례를 범하는 것일까요?
가령, 예배 시간에 좁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나 상사 앞에서 조는 것도 무례한데 하나님 앞에 존다는 것은 큰 실례이지요. 또 예배 시간에 대화하거나 딴생각을 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경우를 빼고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찬양이나 기도 시간은 물론 헌금이나 광고 시간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람들과의 약속도 늦으면 민망한데 예배에 지각한다는 것은 너무 불손한 행동이지요.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입니다. 이 밖에도 술 담배를 하고 예배드리거나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 껌을 씹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지요.
예배에 나올 때 몸가짐도 중요합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 그대로 아무렇게나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복장은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에티켓입니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바로 오는 경우는 예배 시간에 맞춰 서두르다 보면 작업복 차림으로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바쁜 일과 중에도 어찌하든 예배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상대가 기도하고 있는데 다급한 일로 툭툭 쳐서 기도를 중단시킨다면 윗사람과 대화하는데 불쑥 끼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또 기도하는데 누가 자신을 부른다고 곧바로 멈추는 것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는 것이지요. 마무리 기도까지 마친 후 응수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성전에서도 무례히 행하는 일들이 빈번합니다. 성전은 예배실뿐 아니라, 마당과 부속 시설 등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큰소리로 다투거나 사업이나 연예인, 드라마, 오락 등 세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물을 함부로 다루어 상하게 하거나 헌금봉투를 임의로 사용해서도 안 되지요. 성전 부속 사무실에서 인터넷 결제를 하고 물건을 받는 것 역시 명백한 매매입니다. 교회 마당에서 바자회 같은 행사를 여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무례한 행동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도 무례를 잘 범하는 이유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밤늦게 전화를 한다거나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장시간 붙들고 있다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또 약속시간에 늦는 것, 남의 집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내 편에서는 친해서라고 여기지만 상대는 다를 수 있지요.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 해서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또는 절친한 친구에게 예의 없이 대하다 보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 쉽게 반말을 하거나 무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는 불쾌감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 사이에도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세상의 법과 질서도 잘 지켜서 무례히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침을 뱉고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것도 무례하지요.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더욱 말과 행실에 본이 되어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체의 결여 속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사이에 무례히 행치는 않는지 자신을 체크해 보세요.
□ 예배시간이나 다니엘철야 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한다.
□ 성전에서 드라마나 연예인, 직장, 사업터 이야기를 한다.
□ 예배시간에 지각하거나 시간에 임박해 헐레벌떡 온다.
□ 헌금봉투의 용도 외에 설교 말씀을 적거나 메모한다.
□ 축도나 주기도문이 끝나기 전에 나간다.
□ 붐비는 식당에서 새치기를 한다.
□ 친하다고 밤늦게 전화를 스스럼없이 한다.
□ 누가 안 보니까 교통법규를 어긴다.
□ 아무에게나 쉽게 반말을 한다.
□ 약속시간을 종종 어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육체의 결여’란?
사람이 성장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함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통틀어 일컫는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지 못하면 지적인 능력, 행동 능력이 결여되거나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많이 동떨어진 감정 상태를 느낀다.
2025-10-24
제43과사랑은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요일 2:15~16 | 참고 말씀: 잠 14:30
교육목표 :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투기하는 세상의 헛된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을 자랑하며 믿음의 형제 자매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투기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 질투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사랑받을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하고,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대가 승승장구하면 부러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상대가 밉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아 행복을 짓밟고 싶어 하지요. 한편으로는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늘 이 모양인가?’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1.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대부분 낙심하는 마음은 시기,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상대가 잘될 때에 낙심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지요. 낙심하거나 자책하며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自己)’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자아(自我)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투기가 심해지면 상대에게 해를 가하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투기는 악하고 추한 마음의 죄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에 투기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습니다(갈 5:19∼21).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는 죄, 곧 현저한 육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투기의 유형
먼저는, 이성 간의 사랑에서 비롯된 투기입니다. 이성에게 더 사랑을 받으려고 투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경우입니다. 이들은 자매 지간이지만 남편 야곱의 사랑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지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었다면 상대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투기하므로 불행하였으며 자녀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으로, 상대가 나보다 나으므로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대체로 상대가 부유하고 지식이 많으며 외모나 능력 면에서 앞서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고 인정받을 때 투기가 일어납니다. 자신보다 앞서고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고 헐뜯습니다. 내가 잘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경쟁자의 약점을 알리기도 하고 누명을 씌워 상사의 눈 밖에 나도록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를 따돌리거나 선생님에게 사랑받는 아이를 괴롭히는 일도 있지요. 부모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형제간에 다투며 헐뜯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형제들 간에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질서나 직분 또는 신앙이 앞서거나 열심히 충성하는 형제, 자매를 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 보통 자신과 나이나 직분이 비슷한 상대, 잘 아는 사람에 대해 많이 나타납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떤 잘못이나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괜히 불편하고 부글부글합니다. 서로를 잘 알다 보니 자신보다 별로 나은 것도 없고 이런저런 부족함도 많은데 사랑받고 인정받으니 불만스러운 것이지요. 이러한 투기는 주의 종과 성도 사이에, 혹은 교회와 교회 사이, 교단 사이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끼리, 주님의 몸 된 교회 간에 투기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투기로 인생을 허비한 사람입니다. 충신 다윗이 자신보다 백성들의 사랑을 더 받자 투기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오랜 세월 다윗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 14:30) 한 대로 투기는 자신을 상하게 하니 백해무익합니다. 따라서 남보다 앞서고 싶다면 투기함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투기하는 이유는 믿음이 적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적으면 세상 부와 명예, 권세 등을 더 갖기 위해 투기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주 안에서 맺어진 형제 자매가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어찌하든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려고 주의 일에 열심을 냅니다.
2.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이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보다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그것을 내세워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이러한 자랑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이웃에게 자랑한다고 합시다. 함께 기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어떻겠습니까? 대개 자존심이 상하지요. 속이 상한 나머지 괜히 자녀를 나무랍니다.
이웃을 배려하는 선한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자기 자녀가 공부를 잘해도 함부로 자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웃의 자녀도 잘하기를 바라며, 잘되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칭찬해 줄 것입니다.
자랑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찌하든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랑이 다툼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영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스스로 자랑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 질투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마음 안에 ‘이생의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자랑하게 마련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외모를 자랑합니다. 즉 하나님보다 자신이 가진 돈과 외모, 명예, 권세 등이 앞선 것입니다.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헛된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자랑 중에도 선하고 좋은 자랑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7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하신 대로 ‘주 안에서의 자랑’입니다. 주 안에서의 자랑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고백한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고 천국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예수님 덕분에 영생을 얻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도리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축복받을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지요. 결국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립니다. 그러니 사단의 송사를 받아 이런저런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있지요. 세상의 자랑거리는 영원한 생명이나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헛된 욕심을 불러일으켜 멸망으로 가게 만들 뿐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나가면 이생의 자랑을 뽑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마치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았던 장난감이 어른이 되면 너무 시시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생의 자랑을 버리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이다.
3.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4. 요한일서 2:15~16을 써 보세요.
● 알고 넘어갑시다!
히스기야 왕의 자랑으로 인한 여파
히스기야 왕은 한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였고 성전을 정결케 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기도로 앗수르 제국의 공격을 이겨냈고 죽을병에 걸렸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15년간이나 생명을 연장받았다. 그런데 그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이 외교 사절단을 보냈을 때 그들에게 자신의 보물과 성전의 기물들을 보여 주며 위세를 자랑한다. 결국 그 자랑 때문에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그토록 자랑하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다.
교육목표 :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투기하는 세상의 헛된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을 자랑하며 믿음의 형제 자매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투기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 질투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사랑받을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하고,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대가 승승장구하면 부러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상대가 밉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아 행복을 짓밟고 싶어 하지요. 한편으로는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늘 이 모양인가?’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1.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대부분 낙심하는 마음은 시기,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상대가 잘될 때에 낙심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지요. 낙심하거나 자책하며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自己)’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자아(自我)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투기가 심해지면 상대에게 해를 가하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투기는 악하고 추한 마음의 죄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에 투기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습니다(갈 5:19∼21).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는 죄, 곧 현저한 육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투기의 유형
먼저는, 이성 간의 사랑에서 비롯된 투기입니다. 이성에게 더 사랑을 받으려고 투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경우입니다. 이들은 자매 지간이지만 남편 야곱의 사랑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지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었다면 상대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투기하므로 불행하였으며 자녀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으로, 상대가 나보다 나으므로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대체로 상대가 부유하고 지식이 많으며 외모나 능력 면에서 앞서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고 인정받을 때 투기가 일어납니다. 자신보다 앞서고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고 헐뜯습니다. 내가 잘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경쟁자의 약점을 알리기도 하고 누명을 씌워 상사의 눈 밖에 나도록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를 따돌리거나 선생님에게 사랑받는 아이를 괴롭히는 일도 있지요. 부모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형제간에 다투며 헐뜯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형제들 간에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질서나 직분 또는 신앙이 앞서거나 열심히 충성하는 형제, 자매를 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 보통 자신과 나이나 직분이 비슷한 상대, 잘 아는 사람에 대해 많이 나타납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떤 잘못이나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괜히 불편하고 부글부글합니다. 서로를 잘 알다 보니 자신보다 별로 나은 것도 없고 이런저런 부족함도 많은데 사랑받고 인정받으니 불만스러운 것이지요. 이러한 투기는 주의 종과 성도 사이에, 혹은 교회와 교회 사이, 교단 사이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끼리, 주님의 몸 된 교회 간에 투기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투기로 인생을 허비한 사람입니다. 충신 다윗이 자신보다 백성들의 사랑을 더 받자 투기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오랜 세월 다윗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 14:30) 한 대로 투기는 자신을 상하게 하니 백해무익합니다. 따라서 남보다 앞서고 싶다면 투기함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투기하는 이유는 믿음이 적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적으면 세상 부와 명예, 권세 등을 더 갖기 위해 투기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주 안에서 맺어진 형제 자매가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어찌하든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려고 주의 일에 열심을 냅니다.
2.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이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보다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그것을 내세워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이러한 자랑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이웃에게 자랑한다고 합시다. 함께 기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어떻겠습니까? 대개 자존심이 상하지요. 속이 상한 나머지 괜히 자녀를 나무랍니다.
이웃을 배려하는 선한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자기 자녀가 공부를 잘해도 함부로 자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웃의 자녀도 잘하기를 바라며, 잘되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칭찬해 줄 것입니다.
자랑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찌하든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랑이 다툼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영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스스로 자랑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 질투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마음 안에 ‘이생의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자랑하게 마련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외모를 자랑합니다. 즉 하나님보다 자신이 가진 돈과 외모, 명예, 권세 등이 앞선 것입니다.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헛된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자랑 중에도 선하고 좋은 자랑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7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하신 대로 ‘주 안에서의 자랑’입니다. 주 안에서의 자랑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고백한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고 천국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예수님 덕분에 영생을 얻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도리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축복받을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지요. 결국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립니다. 그러니 사단의 송사를 받아 이런저런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있지요. 세상의 자랑거리는 영원한 생명이나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헛된 욕심을 불러일으켜 멸망으로 가게 만들 뿐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나가면 이생의 자랑을 뽑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마치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았던 장난감이 어른이 되면 너무 시시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생의 자랑을 버리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이다.
3.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4. 요한일서 2:15~16을 써 보세요.
● 알고 넘어갑시다!
히스기야 왕의 자랑으로 인한 여파
히스기야 왕은 한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였고 성전을 정결케 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기도로 앗수르 제국의 공격을 이겨냈고 죽을병에 걸렸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15년간이나 생명을 연장받았다. 그런데 그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이 외교 사절단을 보냈을 때 그들에게 자신의 보물과 성전의 기물들을 보여 주며 위세를 자랑한다. 결국 그 자랑 때문에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그토록 자랑하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다.
2025-10-17
제42과사랑은 온유한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5 | 참고 말씀: 시편 37:11
교육목표 :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사랑과 덕이 있는 온유한 마음을 이루어 천국에서 넓은 땅을 차지하는 권세를 소유할 수 있게 한다.
이솝 우화 가운데 해와 바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해와 바람이 길 가는 사람의 외투를 누가 먼저 벗기는지 내기를 합니다.
먼저 바람이 “저런 외투쯤이야….” 하고 자신만만해서는 나무도 뽑힐 만큼 강한 바람을 내뿜었습니다. 나그네는 거센 바람에 행여 외투가 날아갈까 봐 더 단단히 옷깃을 여몄지요. 다음으로 해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따스한 햇볕을 내뿜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더위를 느낀 나그네는 얼른 외투를 벗었습니다.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지요. 온유함은 이와 같습니다.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혀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혀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뜨거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는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습니다.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악이 없고 선해서 마음이 온유하더라도 그것이 내면에만 머문다면 남을 품고 다스리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합니다.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면의 덕을 겸비해야온전하고 더 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온유한 마음에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므로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이루는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이는 소인배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내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봐 줍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에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즉,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은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만 했다 하면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는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불량하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보면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화려한 옷을 잘 갖춰 입었다 해도 그 사람의 내면이 훌륭하지 못하면 화려한 외모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섬기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 )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 )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2.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
이처럼 ( )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3.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 )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잘 갖추어진 ( )으로 남을 다스리며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는다.
● 알고 넘어갑시다!
‘대인과 소인의 차이’
대인은 행동이 앞서지만 소인은 말이 앞선다.
대인은 말을 아끼고 신중히 하지만 소인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쉽게 낸다.
대인은 지적을 받았을 때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지만 소인은 변명하고 불편해하며 삐친다.
대인은 마음의 고통을 받을 때 아무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혼자 묵묵히 안고 가지만 소인은 그 마음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교육목표 :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사랑과 덕이 있는 온유한 마음을 이루어 천국에서 넓은 땅을 차지하는 권세를 소유할 수 있게 한다.
이솝 우화 가운데 해와 바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해와 바람이 길 가는 사람의 외투를 누가 먼저 벗기는지 내기를 합니다.
먼저 바람이 “저런 외투쯤이야….” 하고 자신만만해서는 나무도 뽑힐 만큼 강한 바람을 내뿜었습니다. 나그네는 거센 바람에 행여 외투가 날아갈까 봐 더 단단히 옷깃을 여몄지요. 다음으로 해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따스한 햇볕을 내뿜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더위를 느낀 나그네는 얼른 외투를 벗었습니다.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지요. 온유함은 이와 같습니다.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혀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혀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뜨거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는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습니다.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악이 없고 선해서 마음이 온유하더라도 그것이 내면에만 머문다면 남을 품고 다스리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합니다.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면의 덕을 겸비해야온전하고 더 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온유한 마음에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므로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이루는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이는 소인배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내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봐 줍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에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즉,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은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만 했다 하면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는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불량하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보면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화려한 옷을 잘 갖춰 입었다 해도 그 사람의 내면이 훌륭하지 못하면 화려한 외모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섬기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 )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 )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2.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
이처럼 ( )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3.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 )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잘 갖추어진 ( )으로 남을 다스리며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는다.
● 알고 넘어갑시다!
‘대인과 소인의 차이’
대인은 행동이 앞서지만 소인은 말이 앞선다.
대인은 말을 아끼고 신중히 하지만 소인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쉽게 낸다.
대인은 지적을 받았을 때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지만 소인은 변명하고 불편해하며 삐친다.
대인은 마음의 고통을 받을 때 아무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혼자 묵묵히 안고 가지만 소인은 그 마음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2025-10-10
제41과사랑은 오래 참는 것 | 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44 | 참고 말씀: 마태복음 5:39~40
교육목표 :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끝까지 오래 참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항목 중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만일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것은 영적인 사랑의 시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랑을 주변 사람과 나누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상대를 사랑하려고 애쓰는데 오히려 내 마음에 상처로 돌아오거나 막대한 손실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가 사랑스럽기는커녕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하며 애매히 곤경에 빠뜨린다 해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참고 사랑해야 하지요.
영적인 사랑을 이루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오래 참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혹여 참긴 참는데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왔습니까? 오래 참았는데도 환경이 달라지지 않으니 그만 낙심되었습니까? 그렇다면 환경이나 상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음을 진리로 온전히 이루면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참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 안에 비진리,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노력할 때 오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 중의 오래 참음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성령의 열매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보다 작은 범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요즘에는 상대가 자신의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쉽게 고소합니다. 법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 상대가 아내 혹은 남편, 혈육을 나눈 부모, 자녀인 경우도 많지요. 참고 가만히 있으면 도리어 “바보처럼 산다”고 조롱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했습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악으로 갚지 말고 참아 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이 이러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친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참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2. 무한대의 오래 참음
어떤 사람들은 미움, 혈기 등의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내성적이어서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다가 소위 ‘화병’이라는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기도 하지요. 이런 참음은 스프링을 눌러 놓았다가 손을 떼면 다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인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이 가득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검은색 안경을 쓰면 온통 어둡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하면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어떤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싫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를 미워하고 악하게 행동한다 해도 미운 마음이 들지 않지요.
오래 참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중보 기도를 올린 스데반 집사와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셨을까요? 결코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음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70×7, 즉 490번만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7은 영적으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무한하심을 느낄 수 있지요.
3.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오래 참음
물론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운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화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작음을 나타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혹여 화를 냈다 하더라도 해가 지도록, 즉 오랫동안 분을 품지 말고 털어 버리라는 말입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마음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가지요.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표현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할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과연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도 당연히 오래 참을 일이 없으시지요. 그런데도 굳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변화되기를 바라고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지만,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오래 참고 사랑하면 장차 천국에서 아름다운 처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8∼9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말씀하신 대로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 )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 )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한다.
2.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 억지로 참으며 억울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오래 참음?
1. 자신이 비진리를 버리고 마음을 진리로 개조해 나가기까지의 오래 참음
2.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이해해 주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화평함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
3.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기도의 응답, 구원 등 주실 약속을 받기 위한 오래 참음
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404장 ---------------------- 다 같이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2.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룻기 3:10 ---------------- 인도자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설 교 ------------------ 행복 찾아 만들기 ------------------ 설교자
2. 설교 예문
‘행복’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행복이란 ‘복된 좋은 운수’ 또는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을 느끼며 염려, 근심 없이 몸과 마음이 평안한 상태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행복한 길을 찾기 위하여 부를 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학문에 심취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신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업이 번창하여 물질이 넉넉하고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들로 남에게 말 못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질병 없이 건강하며 명예와 권세가 있어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부부간의 불화, 고부간의 갈등, 일가친척의 문제 등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가 보아도 행복한 집이라고 소문이 났던 가정에 불의의 사고나 불행이 찾아들어 하루아침에 웃음과 행복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슬픔의 그림자만 맴돌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행복이란 항상 기쁨과 감사 속에서 아무런 염려 없이 살아가며 만족을 느끼되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행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관상이나 손금 등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오직 자신의 행함과 마음 중심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행복이란 스스로가 찾아서 만들어 나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에 놓여 있는 ‘룻’이라는 한 여인이 어떻게 행복을 찾아 만들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룻은 모압지방에 사는 여인으로서, 기근을 피해 이주해 온 유다 베들레헴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식도 없이 남편을 잃게 된 룻은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마음과 뜻을 다해 봉양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젊음과 자신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룻의 현숙함을 알고 있었던 부자 보아스는 룻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후 룻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다윗의 조부가 됩니다. 결국 룻은 하나님의 은혜로 행복한 가정을 꾸몄을 뿐 아니라,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여인 룻은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의 어떤 축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룻처럼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정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중심이 되면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키며 전화위복이 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룻과 같이 변함없는 중심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면 누구든지 행복을 찾아 만들 수 있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끝까지 오래 참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항목 중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만일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것은 영적인 사랑의 시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랑을 주변 사람과 나누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상대를 사랑하려고 애쓰는데 오히려 내 마음에 상처로 돌아오거나 막대한 손실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가 사랑스럽기는커녕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하며 애매히 곤경에 빠뜨린다 해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참고 사랑해야 하지요.
영적인 사랑을 이루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오래 참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혹여 참긴 참는데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왔습니까? 오래 참았는데도 환경이 달라지지 않으니 그만 낙심되었습니까? 그렇다면 환경이나 상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음을 진리로 온전히 이루면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참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 안에 비진리,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노력할 때 오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 중의 오래 참음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성령의 열매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보다 작은 범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요즘에는 상대가 자신의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쉽게 고소합니다. 법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 상대가 아내 혹은 남편, 혈육을 나눈 부모, 자녀인 경우도 많지요. 참고 가만히 있으면 도리어 “바보처럼 산다”고 조롱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했습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악으로 갚지 말고 참아 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이 이러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친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참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2. 무한대의 오래 참음
어떤 사람들은 미움, 혈기 등의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내성적이어서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다가 소위 ‘화병’이라는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기도 하지요. 이런 참음은 스프링을 눌러 놓았다가 손을 떼면 다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인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이 가득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검은색 안경을 쓰면 온통 어둡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하면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어떤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싫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를 미워하고 악하게 행동한다 해도 미운 마음이 들지 않지요.
오래 참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중보 기도를 올린 스데반 집사와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셨을까요? 결코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음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70×7, 즉 490번만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7은 영적으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무한하심을 느낄 수 있지요.
3.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오래 참음
물론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운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화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작음을 나타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혹여 화를 냈다 하더라도 해가 지도록, 즉 오랫동안 분을 품지 말고 털어 버리라는 말입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마음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가지요.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표현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할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과연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도 당연히 오래 참을 일이 없으시지요. 그런데도 굳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변화되기를 바라고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지만,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오래 참고 사랑하면 장차 천국에서 아름다운 처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8∼9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말씀하신 대로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 )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 )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한다.
2.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 억지로 참으며 억울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오래 참음?
1. 자신이 비진리를 버리고 마음을 진리로 개조해 나가기까지의 오래 참음
2.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이해해 주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화평함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
3.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기도의 응답, 구원 등 주실 약속을 받기 위한 오래 참음
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404장 ---------------------- 다 같이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2.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룻기 3:10 ---------------- 인도자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설 교 ------------------ 행복 찾아 만들기 ------------------ 설교자
2. 설교 예문
‘행복’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행복이란 ‘복된 좋은 운수’ 또는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을 느끼며 염려, 근심 없이 몸과 마음이 평안한 상태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행복한 길을 찾기 위하여 부를 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학문에 심취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신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업이 번창하여 물질이 넉넉하고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들로 남에게 말 못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질병 없이 건강하며 명예와 권세가 있어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부부간의 불화, 고부간의 갈등, 일가친척의 문제 등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가 보아도 행복한 집이라고 소문이 났던 가정에 불의의 사고나 불행이 찾아들어 하루아침에 웃음과 행복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슬픔의 그림자만 맴돌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행복이란 항상 기쁨과 감사 속에서 아무런 염려 없이 살아가며 만족을 느끼되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행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관상이나 손금 등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오직 자신의 행함과 마음 중심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행복이란 스스로가 찾아서 만들어 나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에 놓여 있는 ‘룻’이라는 한 여인이 어떻게 행복을 찾아 만들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룻은 모압지방에 사는 여인으로서, 기근을 피해 이주해 온 유다 베들레헴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식도 없이 남편을 잃게 된 룻은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마음과 뜻을 다해 봉양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젊음과 자신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룻의 현숙함을 알고 있었던 부자 보아스는 룻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후 룻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다윗의 조부가 됩니다. 결국 룻은 하나님의 은혜로 행복한 가정을 꾸몄을 뿐 아니라,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여인 룻은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의 어떤 축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룻처럼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정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중심이 되면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키며 전화위복이 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룻과 같이 변함없는 중심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면 누구든지 행복을 찾아 만들 수 있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25-10-03
제40과영적인 사랑의 중요성
고린도전서 13:1~3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1~3 | 외울말씀 : 골로새서 3:23 | 참고 말씀: 고린도전서 2:6~8
교육목표 : 범사에 누구를 대하든지 영적인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해 줌으로 생명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영적인 사랑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답게 해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묵직한 쇠나 구리는 두드려도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구리나 꽹과리가 소리를 낸다면 속이 비었거나 가볍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으로 무조건 상대를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거슬리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아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을 돌아보아 내 의와 틀 속에 말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목마른 영혼을 시원케 하고 아파하는 영혼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생명의 물이요, 값진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이지요.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 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큰 믿음을 가졌다고 사랑까지 큰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성령을 받은 것도,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지요.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체험적인 신앙으로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구제는 생활하는 데 필요한 양식과 의복, 집, 물질 등을 공급해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여 영혼을 살리는 구제가 되어야 합니다. 구제할 때는 성령의 주관을 받아 상대에게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구제는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거나 사망의 길로 가게 만들지요.
가령, 술과 노름으로 가난하게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시험 환난에 빠진 사람을 구제한다면 더욱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랑으로 구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다음으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올리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에게 모든 수고를 갚아 주시고 위로하시며,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 )를 말한다.
2.‘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 )하는 것을 의미한다.
3. 믿음은 있는데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 )이 없기 때문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
마가복음 12장에는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을 드림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았던 한 과부가 나온다. 그녀는 비록 두 렙돈에 불과했지만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렙돈은 당시 그리스의 가장 작은 동전 단위이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셨듯이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를 전부 드렸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 전부가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는 표현이다. 곧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반면 사람을 의식한 예물이나 억지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니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교육목표 : 범사에 누구를 대하든지 영적인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해 줌으로 생명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영적인 사랑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답게 해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묵직한 쇠나 구리는 두드려도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구리나 꽹과리가 소리를 낸다면 속이 비었거나 가볍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으로 무조건 상대를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거슬리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아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을 돌아보아 내 의와 틀 속에 말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목마른 영혼을 시원케 하고 아파하는 영혼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생명의 물이요, 값진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이지요.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 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큰 믿음을 가졌다고 사랑까지 큰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성령을 받은 것도,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지요.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체험적인 신앙으로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구제는 생활하는 데 필요한 양식과 의복, 집, 물질 등을 공급해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여 영혼을 살리는 구제가 되어야 합니다. 구제할 때는 성령의 주관을 받아 상대에게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구제는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거나 사망의 길로 가게 만들지요.
가령, 술과 노름으로 가난하게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시험 환난에 빠진 사람을 구제한다면 더욱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랑으로 구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다음으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올리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에게 모든 수고를 갚아 주시고 위로하시며,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 )를 말한다.
2.‘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 )하는 것을 의미한다.
3. 믿음은 있는데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 )이 없기 때문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
마가복음 12장에는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을 드림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았던 한 과부가 나온다. 그녀는 비록 두 렙돈에 불과했지만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렙돈은 당시 그리스의 가장 작은 동전 단위이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셨듯이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를 전부 드렸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 전부가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는 표현이다. 곧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반면 사람을 의식한 예물이나 억지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니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2025-09-26
제39과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
요한일서 4:7~8
읽을말씀 : 요한일서 4:7~8 | 외울말씀 : 이사야 49:15 | 참고 말씀: 사무엘상 18:1~4
교육목표 :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
사전에 보면 ‘사랑’을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 또는 그 마음을 말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이 이런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사무엘상 18장 1~4절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했지요.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그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이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원로목사님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원로목사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간 계속된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원로목사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원로목사님의 전부가 되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삶을 드려 헌신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와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쉽게 변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이지요.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번 여쭙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 되고 점점 부모님에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구 간의 사랑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였다면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나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 서는 일을 금하셨는데 불순종할 경우 사단이 역사하므로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하고 맙니다. 여러분은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자신의 실리를 따지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영적인 사랑을 얼마나 깊이 나누고 있나요?
4. 다윗은 사랑하는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자 그의 아들을 어떻게 대해 주었나요?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다(삼상 17:49).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교육목표 :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
사전에 보면 ‘사랑’을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 또는 그 마음을 말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이 이런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사무엘상 18장 1~4절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했지요.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그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이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원로목사님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원로목사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간 계속된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원로목사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원로목사님의 전부가 되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삶을 드려 헌신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와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쉽게 변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이지요.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번 여쭙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 되고 점점 부모님에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구 간의 사랑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였다면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나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 서는 일을 금하셨는데 불순종할 경우 사단이 역사하므로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하고 맙니다. 여러분은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자신의 실리를 따지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영적인 사랑을 얼마나 깊이 나누고 있나요?
4. 다윗은 사랑하는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자 그의 아들을 어떻게 대해 주었나요?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다(삼상 17:49).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2025-09-19
제38과영적인 어린아이
마태복음 18:1~4
읽을말씀 : 마태복음 18:1~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8:3 | 참고 말씀: 마태복음 23:12
교육목표 : 단순하고 순수하며 교만하지 않은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첫째로, 단순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쉽게 무엇에 잘 적응하고,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변할 수 있습니다. 어른보다는 세상 때가 묻지 않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으며 사고방식도 단순합니다.
마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처럼 어린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동생을 사랑해야 한다. 군것질을 많이 하면 안 된다.”라고 가르치는 대로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할 때도 이유를 대거나 변명하지 않았지요.
‘이것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인지, 나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반드시 선하신 뜻이 있는 줄 믿고 즉시 순종했지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여 진리를 배우는 대로 믿고 들은 말씀에 그대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순수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떤 생각이나 판단, 분별 능력이 전혀 없는 무 상태로 태어납니다. 자라면서 부모와 가족, 이웃과 친구를 통해 선과 악을 배우고 사리를 분별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것을 얻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하고,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으며 순수하게 반응합니다. 잘못했을 때는 두려워하고 양심의 가책을 크게 받습니다.
반면 어른들은 세상 어둠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니 죄를 범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 줄 배웠어도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잘못을 행하면서도 무감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어떻습니까? 선악 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악한 것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은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진리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몹시 싫어하고 어찌하든 버리려고 합니다. 오직 선한 것만 간절히 사모하며 미세한 죄악이라 해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지식이 적고 힘이 약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가르쳐 주면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그대로 믿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숨기려 하지 않고 부모나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거나 인정받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자신의 지식과 맞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판단하거나 오해하지 않고 믿고 순종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의 역사들을 믿고 순종한 사람은 “이만한 권능을 행하는 분이라면 정녕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여겼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아도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겸손히 인정하였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들을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도 체험하기를 사모합니다. 진리를 들으면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겸손히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놀라운 역사를 체험케 하십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첫째로, 불같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비진리를 보고 듣고 배우면서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 갔고 교만, 혈기, 판단, 욕심, 시기 등 비진리로 마음이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불같은 기도와 하나님 말씀으로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딤전 4:5). 욕심과 자존심 그 밖의 모든 죄악들을 버리는 만큼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마음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말씀을 듣는 대로 믿고 깨달으며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이론과 생각을 파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 말씀과 맞지 않을 때는 무조건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임을 믿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지요.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이론은 원수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온 것으로 하나님 말씀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가 원수 마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진리가 아닌 것들을 생각에 담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비진리 속에 성장했기 때문에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을 버려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이론으로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고 부인하려 한다면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높아진 교만이지요.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어드립니다. 이것을 본 어떤 사람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못마땅히 여기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셨습니다(막 14:8~9).
이 여인은 생각을 동원치 않고 선한 마음으로 행했기에 예수님께 칭찬받고 길이 기억된 바 되었습니다. 반면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므로 결국 사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하신 것입니다(롬 8:7).
그러므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불같은 기도 속에 말씀으로 무장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말을 진리에 비춰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모든 이론과 지식을 파하며 오직 영의 생각과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불같은 기도와 말씀 무장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어린아이는 어떠한 특징이 있을까요?
① ( )하다.
② ( )하다.
③ ( )하지 않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불같은 기도와 ( )을 통해 ( )을 벗어 버려야 한다.
② 모든 ( )과 ( )을 파해야 한다.
● 알고 넘어갑시다!
‘이론’이란?
지식을 바탕으로 경험이나 사고, 학습 등을 통해 스스로 정립시켜 놓은 논리를 말한다. 이론은 각 사람의 체험과 생각, 시대에 따라 달라지므로 변론을 낳으며 진리인 하나님 말씀과는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교육목표 : 단순하고 순수하며 교만하지 않은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첫째로, 단순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쉽게 무엇에 잘 적응하고,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변할 수 있습니다. 어른보다는 세상 때가 묻지 않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으며 사고방식도 단순합니다.
마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처럼 어린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동생을 사랑해야 한다. 군것질을 많이 하면 안 된다.”라고 가르치는 대로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할 때도 이유를 대거나 변명하지 않았지요.
‘이것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인지, 나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반드시 선하신 뜻이 있는 줄 믿고 즉시 순종했지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여 진리를 배우는 대로 믿고 들은 말씀에 그대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순수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떤 생각이나 판단, 분별 능력이 전혀 없는 무 상태로 태어납니다. 자라면서 부모와 가족, 이웃과 친구를 통해 선과 악을 배우고 사리를 분별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것을 얻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하고,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으며 순수하게 반응합니다. 잘못했을 때는 두려워하고 양심의 가책을 크게 받습니다.
반면 어른들은 세상 어둠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니 죄를 범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 줄 배웠어도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잘못을 행하면서도 무감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어떻습니까? 선악 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악한 것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은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진리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몹시 싫어하고 어찌하든 버리려고 합니다. 오직 선한 것만 간절히 사모하며 미세한 죄악이라 해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지식이 적고 힘이 약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가르쳐 주면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그대로 믿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숨기려 하지 않고 부모나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거나 인정받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자신의 지식과 맞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판단하거나 오해하지 않고 믿고 순종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의 역사들을 믿고 순종한 사람은 “이만한 권능을 행하는 분이라면 정녕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여겼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아도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겸손히 인정하였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들을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도 체험하기를 사모합니다. 진리를 들으면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겸손히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놀라운 역사를 체험케 하십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첫째로, 불같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비진리를 보고 듣고 배우면서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 갔고 교만, 혈기, 판단, 욕심, 시기 등 비진리로 마음이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불같은 기도와 하나님 말씀으로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딤전 4:5). 욕심과 자존심 그 밖의 모든 죄악들을 버리는 만큼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마음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말씀을 듣는 대로 믿고 깨달으며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이론과 생각을 파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 말씀과 맞지 않을 때는 무조건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임을 믿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지요.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이론은 원수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온 것으로 하나님 말씀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가 원수 마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진리가 아닌 것들을 생각에 담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비진리 속에 성장했기 때문에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을 버려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이론으로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고 부인하려 한다면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높아진 교만이지요.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어드립니다. 이것을 본 어떤 사람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못마땅히 여기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셨습니다(막 14:8~9).
이 여인은 생각을 동원치 않고 선한 마음으로 행했기에 예수님께 칭찬받고 길이 기억된 바 되었습니다. 반면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므로 결국 사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하신 것입니다(롬 8:7).
그러므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불같은 기도 속에 말씀으로 무장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말을 진리에 비춰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모든 이론과 지식을 파하며 오직 영의 생각과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불같은 기도와 말씀 무장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어린아이는 어떠한 특징이 있을까요?
① ( )하다.
② ( )하다.
③ ( )하지 않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불같은 기도와 ( )을 통해 ( )을 벗어 버려야 한다.
② 모든 ( )과 ( )을 파해야 한다.
● 알고 넘어갑시다!
‘이론’이란?
지식을 바탕으로 경험이나 사고, 학습 등을 통해 스스로 정립시켜 놓은 논리를 말한다. 이론은 각 사람의 체험과 생각, 시대에 따라 달라지므로 변론을 낳으며 진리인 하나님 말씀과는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2025-09-12
제37과의를 위해 핍박받은 바울
고린도후서 11:23~27
읽을말씀 : 고린도후서 11:23~27 | 외울말씀 : 디모데후서 4:8 | 참고 말씀: 로마서 9:3
교육목표 : 이방인의 사도로서 세계 선교의 초석이 된 사도 바울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참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사도 바울은 한 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은 날이 갈수록 더욱 진해졌지요. 주님의 마음을 닮아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로서 권능을 베풀며 이방인 선교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순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1. 주님을 만나 회심한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당대 최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던 그는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대단했습니다.
자기 의가 아주 강하여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변론하며 지지 않으려는 성품이었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고 전파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했지요. 마치 모세와 율법을 무시하는 것 같아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느 날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서 빛이 바울을 둘러 비추더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시지요. 사울은 바울의 옛 이름입니다.
그 후 바울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가 안수한 다음에야 볼 수 있었지요. 그는 아나니아를 통해 앞으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 선택된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고 잔해하던 자였는데 이제는 주 안에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삶으로 온전히 바뀌었지요.
2. 숱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오직 감사했던 사도 바울
바울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자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귀한 사명까지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했지요. 그러니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해도 주를 향한 마음이 변함없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은 더욱 짙어질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고, 감옥에 갇혔다 해도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며 앞의 푯대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겼지요. 또한 영혼을 구원하며 하늘에 많은 상급을 쌓을 뿐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고 모든 것을 드리기까지 헌신했는데 원하는 대로 축복이 임하지 않았을 때 슬퍼하지는 않았는지요? 또 스스로 실망하여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많은 분야에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에 처했다 할지라도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중심에서 감사하며 작은 사명이라도 귀히 여기며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3. 영혼 사랑이 승했던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면서도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도 숱한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기도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도록, 성도들이 진리 안에 살도록 눈물로 훈계하며 간구하였지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자기와 같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 중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했지요.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며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도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누구보다 지옥의 참담함과 무서움을 잘 알면서도 담대히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생명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승했기 때문입니다.
4. 천국 소망으로 가득 찼던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숱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장차 주님을 뵈올 수 있다는 천국 소망으로 넘쳐났습니다. 이 세상 무엇도 주님과는 비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히 주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 7절 이하에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고백했지요.
사도 바울은 주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에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으며 천국 소망 가운데 어떠한 핍박이 오더라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승리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하신 대로 오직 천국 소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후 한 번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에 이를 때도 오직 감사뿐이었습니다.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이 든 것이 아니었고,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뵈올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했기에 천국 소망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감사했기에 연단을 통해 권능의 대사도로 나와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변치 않고 천국 소망 가운데 죽도록 충성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크게 확장시켜 나가는 영적 장수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신약 시대 최고의 권능의 사도로 이방인 선교에 앞장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2. 사도 바울이 말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누구를 가리킬까요?
3.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어떠한 고난을 당했는지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을 읽으면서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바울 서신’이란?
바울에 의해 쓰인 편지들로 신약 성경 27권 중 14권이 이에 해당한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가 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감옥에서 기록하였다 하여 옥중서신이라 한다.
교육목표 : 이방인의 사도로서 세계 선교의 초석이 된 사도 바울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참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사도 바울은 한 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은 날이 갈수록 더욱 진해졌지요. 주님의 마음을 닮아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로서 권능을 베풀며 이방인 선교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순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1. 주님을 만나 회심한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당대 최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던 그는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대단했습니다.
자기 의가 아주 강하여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변론하며 지지 않으려는 성품이었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고 전파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했지요. 마치 모세와 율법을 무시하는 것 같아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느 날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서 빛이 바울을 둘러 비추더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시지요. 사울은 바울의 옛 이름입니다.
그 후 바울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가 안수한 다음에야 볼 수 있었지요. 그는 아나니아를 통해 앞으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 선택된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고 잔해하던 자였는데 이제는 주 안에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삶으로 온전히 바뀌었지요.
2. 숱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오직 감사했던 사도 바울
바울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자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귀한 사명까지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했지요. 그러니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해도 주를 향한 마음이 변함없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은 더욱 짙어질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고, 감옥에 갇혔다 해도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며 앞의 푯대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겼지요. 또한 영혼을 구원하며 하늘에 많은 상급을 쌓을 뿐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고 모든 것을 드리기까지 헌신했는데 원하는 대로 축복이 임하지 않았을 때 슬퍼하지는 않았는지요? 또 스스로 실망하여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많은 분야에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에 처했다 할지라도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중심에서 감사하며 작은 사명이라도 귀히 여기며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3. 영혼 사랑이 승했던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면서도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도 숱한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기도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도록, 성도들이 진리 안에 살도록 눈물로 훈계하며 간구하였지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자기와 같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 중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했지요.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며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도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누구보다 지옥의 참담함과 무서움을 잘 알면서도 담대히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생명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승했기 때문입니다.
4. 천국 소망으로 가득 찼던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숱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장차 주님을 뵈올 수 있다는 천국 소망으로 넘쳐났습니다. 이 세상 무엇도 주님과는 비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히 주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 7절 이하에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고백했지요.
사도 바울은 주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에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으며 천국 소망 가운데 어떠한 핍박이 오더라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승리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하신 대로 오직 천국 소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후 한 번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에 이를 때도 오직 감사뿐이었습니다.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이 든 것이 아니었고,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뵈올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했기에 천국 소망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감사했기에 연단을 통해 권능의 대사도로 나와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변치 않고 천국 소망 가운데 죽도록 충성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크게 확장시켜 나가는 영적 장수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신약 시대 최고의 권능의 사도로 이방인 선교에 앞장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2. 사도 바울이 말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누구를 가리킬까요?
3.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어떠한 고난을 당했는지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을 읽으면서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바울 서신’이란?
바울에 의해 쓰인 편지들로 신약 성경 27권 중 14권이 이에 해당한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가 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감옥에서 기록하였다 하여 옥중서신이라 한다.
2025-09-05
제36과온 집에 충성한 모세
민수기 12:3, 7
읽을말씀 : 민수기 12:3, 7 | 외울말씀 : 민수기 12:7 | 참고 말씀: 출애굽기 32:32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처럼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하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모세는 애굽에서 노예로 학대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낸 출애굽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을 일삼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아비의 심정으로 늘 마음에 품고 놓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백성이기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지만 모세는 이들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습니다.
1. 모세의 출생과 시대적 배경
이스라엘 백성이 거한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해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야곱과 그의 일가족은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거기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어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목축업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주 당시 70명에 불과했던 야곱의 혈속은 갈수록 번성해 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애굽 총리 요셉과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죽고 요셉을 모르는 사람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은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학대하지요(출 1:9~10).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더욱 번성하니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모세는 이런 암울한 시대에 태어났지요. 그의 부모는 석 달간 모세를 숨겨 키우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웁니다. 그때 마침 목욕하러 나온 공주가 그 상자를 발견하고,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모세의 친어머니가 유모로 추천되고, 공주는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며 키우게 합니다.
이로써 모세는 어린 시절 친어머니에게 히브리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웠고, 애굽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 한편에는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애굽에서 고통 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지요.
2. 광야에서 40년 연단의 세월을 보낸 모세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민족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그를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히브리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모세가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며 말립니다. 그러자 그가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하므로 애굽인을 죽인 것이 탄로가 납니다. 이에 바로왕이 모세를 죽이려고 찾습니다.
만일 모세가 자기 안위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봐 모른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민족인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히 11:25).
결국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그곳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양 무리를 치며 삽니다. 왕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평범한 양치기의 생활에 적응해 갔지요. 이러한 광야생활이 적응되자 마음의 연단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인생의 허무함이 느껴졌지요. 광야에서 양을 치며 4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적으로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있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원하셨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이스라엘 자손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온전히 비운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고 큰 사명을 주십니다.
3.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모세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합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아도 품어 주지요.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바라며 기다려 줍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가는 40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이내 원망하였지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범죄함으로 마침내 멸망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하였는지 성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서 더디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신으로 섬기며 방탕히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셨던지 백성들을 진멸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때 모세는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간절한 중보 기도를 올립니다(출 32:31~32).
모세는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즉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백성들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자기 생명을 담보로 멸망당할 위기에 처한 백성을 구해 달라고 했지요. 모세의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의 간구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십니다. 이처럼 모세는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품었습니다.
4. 온 집에 충성한 모세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자기가 속한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일터, 사업터 등 주어진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당시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이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져야 할 짐도 많고 심리적으로 압박감이 크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백성들을 품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날부터 생명이 다하기까지 모세는 단 한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고 늘 간구했던 것입니다.
혹여 ‘사명이 무겁고 힘들다. 사명을 놓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모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충성하고서도 열매가 적다며 민망히 여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사함으로 잘 감당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낸 출애굽의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2. 하나님께서는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닌, 어떤 모습을 원하셨나요?
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방탕하게 먹고 마셨을 때 진멸하고자 하십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올린 기도를 써 보세요.
4. 히브리서 3장 5절에“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 )으로 충성하였고”말씀합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모세의 선’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2.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에 중심에서 감사했다.
3.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다.
4. 온 집에 충성했다.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처럼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하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모세는 애굽에서 노예로 학대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낸 출애굽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을 일삼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아비의 심정으로 늘 마음에 품고 놓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백성이기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지만 모세는 이들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습니다.
1. 모세의 출생과 시대적 배경
이스라엘 백성이 거한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해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야곱과 그의 일가족은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거기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어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목축업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주 당시 70명에 불과했던 야곱의 혈속은 갈수록 번성해 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애굽 총리 요셉과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죽고 요셉을 모르는 사람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은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학대하지요(출 1:9~10).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더욱 번성하니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모세는 이런 암울한 시대에 태어났지요. 그의 부모는 석 달간 모세를 숨겨 키우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웁니다. 그때 마침 목욕하러 나온 공주가 그 상자를 발견하고,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모세의 친어머니가 유모로 추천되고, 공주는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며 키우게 합니다.
이로써 모세는 어린 시절 친어머니에게 히브리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웠고, 애굽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 한편에는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애굽에서 고통 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지요.
2. 광야에서 40년 연단의 세월을 보낸 모세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민족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그를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히브리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모세가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며 말립니다. 그러자 그가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하므로 애굽인을 죽인 것이 탄로가 납니다. 이에 바로왕이 모세를 죽이려고 찾습니다.
만일 모세가 자기 안위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봐 모른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민족인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히 11:25).
결국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그곳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양 무리를 치며 삽니다. 왕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평범한 양치기의 생활에 적응해 갔지요. 이러한 광야생활이 적응되자 마음의 연단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인생의 허무함이 느껴졌지요. 광야에서 양을 치며 4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적으로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있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원하셨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이스라엘 자손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온전히 비운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고 큰 사명을 주십니다.
3.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모세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합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아도 품어 주지요.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바라며 기다려 줍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가는 40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이내 원망하였지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범죄함으로 마침내 멸망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하였는지 성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서 더디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신으로 섬기며 방탕히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셨던지 백성들을 진멸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때 모세는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간절한 중보 기도를 올립니다(출 32:31~32).
모세는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즉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백성들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자기 생명을 담보로 멸망당할 위기에 처한 백성을 구해 달라고 했지요. 모세의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의 간구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십니다. 이처럼 모세는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품었습니다.
4. 온 집에 충성한 모세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자기가 속한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일터, 사업터 등 주어진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당시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이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져야 할 짐도 많고 심리적으로 압박감이 크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백성들을 품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날부터 생명이 다하기까지 모세는 단 한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고 늘 간구했던 것입니다.
혹여 ‘사명이 무겁고 힘들다. 사명을 놓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모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충성하고서도 열매가 적다며 민망히 여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사함으로 잘 감당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낸 출애굽의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2. 하나님께서는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닌, 어떤 모습을 원하셨나요?
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방탕하게 먹고 마셨을 때 진멸하고자 하십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올린 기도를 써 보세요.
4. 히브리서 3장 5절에“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 )으로 충성하였고”말씀합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모세의 선’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2.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에 중심에서 감사했다.
3.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다.
4. 온 집에 충성했다.
2025-08-29
제35과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읽을말씀 : 요한복음 21:15~17 | 외울말씀 : 요한복음 6:53 | 참고 말씀: 요한복음 1:29
교육목표 : 주님께서 수제자 베드로에게 당부하신 대로 영혼 구원에 힘쓰는 일꾼이 되게 한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고향 갈릴리로 돌아온 일곱 제자들은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함께 따라 나섭니다.
제자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십니다. 그대로 순종하자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날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과 함께 맞는 아침은 여느 때보다 행복했습니다.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침 식사를 한 후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는 시몬 베드로에게 질문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의 반석 위에 선 모든 사람들,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주의 종들과 일꾼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지요.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모르셔서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경고라고도 합니다. 결코 주님은 이미 회개하고 돌이킨 일로 찌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는 베드로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그 마음에 열정이 어떠했는지 잘 아셨지만, 스스로 고백하게 함으로써 온전히 마음에 각인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주님께서 물으실 때 어떻게 고백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이 있는 만큼 주님의 마음에 맞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많은 연단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세 번 물으실 때에 본문과 같이 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그는 주님께서 왜 자신에게 이같이 질문하셨는지를 깨우치고, 그때 자신이 어떻게 답하였는지를 떠올리며 사도의 길을 충만하게 달려갔지요.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돌보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힘쓰다가 기쁨으로 순교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2. 내 어린양을 먹이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신 첫 번째 질문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말씀하시지요.
여기서 어린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혹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양이라고 표현하셨으니 어린양은 초신자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양은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표현했지요. 레위기에는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는 장면이 곳곳에 나옵니다. 어린양은 영적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오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2장 1~11절에도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어린양을 취하여 불에 구워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 51~5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했습니다.
바로 어린양인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만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요 1:14). 따라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잘 양식 삼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신 것은 주님의 살과 피 곧 진리인 성경 66권의 말씀을 먹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지요.
3. 내 양을 치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다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이때도 베드로는 동일하게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도하며 죄를 싸워 버리고 계명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꾼이 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양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베드로전서 5장 2~3절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말씀합니다. 즉 양이란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므로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은 성도들을 열심히 심방하고 말씀을 가르쳐 주며 기도하여 진리 가운데 인도해 주라는 뜻입니다. 맡겨진 양 떼에게 꼴을 잘 먹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밝히 알고 믿음이 성장하도록 해 주며 또 시험 환난을 피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알려 주고 기도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교회 건물이나 양 떼가 없었으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고 양 떼를 만들어 갔습니다. 오늘날은 교회를 세워 양 무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면서 정성껏 갈무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의 종뿐 아니라 장로, 집사, 교사 등 직분을 받아 양 무리를 치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함으로, 영혼을 사랑하며 넘어진 양 떼를 일으켜 주고 치료해 주는 등 바른길로 인도해 줘야 합니다. 이렇게 열심과 의욕을 가지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최선을 다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곧 양을 치는 것입니다.
4. 내 양을 먹이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십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똑같은 질문에 근심하여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십니다.
베드로가 근심한 것은 어떤 악한 마음이나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시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 중에는 믿음이 잘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변화가 더디고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있지요. 이런 사람들을 더 큰 사랑과 섬김으로 돌보는 것이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병들고 상한 양을 치료하여 건강하게 하고, 길 잃은 양을 바른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지요. 진리 안에 바로 서지 못하고 당을 지으며, 시기 질투하는 등 목자를 시험하는 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생명의 양식을 먹임으로 순한 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면 양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 하늘로부터 임하여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후,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심으로 그 중요성을 명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더욱 믿음과 순종, 겸손과 섬김으로 주어진 사명을 능력 있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는 말씀은, 주님의 살과 피 곧 진리인 성경 66권의 말씀을 먹이라는 의미이다. 바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2. ( )는 말씀은, 성도들을 열심히 심방하고 말씀을 가르쳐 주며 기도하여 진리 가운데 인도해 주라는 뜻이다.
3. ( )는 말씀은, 변화가 더디고 시험에 드는 사람, 병들고 상한 영혼들을 더 큰 사랑과 섬김으로 돌보는 것을 말한다.
● 알고 넘어갑시다!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을 의로 여기고 그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며 천국 열쇠를 주셨다(마 16:19).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생명 다해 주님을 증거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다.
교육목표 : 주님께서 수제자 베드로에게 당부하신 대로 영혼 구원에 힘쓰는 일꾼이 되게 한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고향 갈릴리로 돌아온 일곱 제자들은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함께 따라 나섭니다.
제자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십니다. 그대로 순종하자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날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과 함께 맞는 아침은 여느 때보다 행복했습니다.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침 식사를 한 후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는 시몬 베드로에게 질문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의 반석 위에 선 모든 사람들,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주의 종들과 일꾼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지요.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모르셔서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경고라고도 합니다. 결코 주님은 이미 회개하고 돌이킨 일로 찌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는 베드로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그 마음에 열정이 어떠했는지 잘 아셨지만, 스스로 고백하게 함으로써 온전히 마음에 각인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주님께서 물으실 때 어떻게 고백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이 있는 만큼 주님의 마음에 맞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많은 연단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세 번 물으실 때에 본문과 같이 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그는 주님께서 왜 자신에게 이같이 질문하셨는지를 깨우치고, 그때 자신이 어떻게 답하였는지를 떠올리며 사도의 길을 충만하게 달려갔지요.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돌보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힘쓰다가 기쁨으로 순교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2. 내 어린양을 먹이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신 첫 번째 질문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말씀하시지요.
여기서 어린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혹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양이라고 표현하셨으니 어린양은 초신자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양은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표현했지요. 레위기에는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는 장면이 곳곳에 나옵니다. 어린양은 영적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오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2장 1~11절에도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어린양을 취하여 불에 구워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 51~5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했습니다.
바로 어린양인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만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요 1:14). 따라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잘 양식 삼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신 것은 주님의 살과 피 곧 진리인 성경 66권의 말씀을 먹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지요.
3. 내 양을 치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다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이때도 베드로는 동일하게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도하며 죄를 싸워 버리고 계명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꾼이 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양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베드로전서 5장 2~3절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말씀합니다. 즉 양이란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므로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은 성도들을 열심히 심방하고 말씀을 가르쳐 주며 기도하여 진리 가운데 인도해 주라는 뜻입니다. 맡겨진 양 떼에게 꼴을 잘 먹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밝히 알고 믿음이 성장하도록 해 주며 또 시험 환난을 피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알려 주고 기도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교회 건물이나 양 떼가 없었으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고 양 떼를 만들어 갔습니다. 오늘날은 교회를 세워 양 무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면서 정성껏 갈무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의 종뿐 아니라 장로, 집사, 교사 등 직분을 받아 양 무리를 치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함으로, 영혼을 사랑하며 넘어진 양 떼를 일으켜 주고 치료해 주는 등 바른길로 인도해 줘야 합니다. 이렇게 열심과 의욕을 가지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최선을 다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곧 양을 치는 것입니다.
4. 내 양을 먹이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십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똑같은 질문에 근심하여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십니다.
베드로가 근심한 것은 어떤 악한 마음이나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시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 중에는 믿음이 잘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변화가 더디고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있지요. 이런 사람들을 더 큰 사랑과 섬김으로 돌보는 것이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병들고 상한 양을 치료하여 건강하게 하고, 길 잃은 양을 바른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지요. 진리 안에 바로 서지 못하고 당을 지으며, 시기 질투하는 등 목자를 시험하는 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생명의 양식을 먹임으로 순한 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면 양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 하늘로부터 임하여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후,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심으로 그 중요성을 명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더욱 믿음과 순종, 겸손과 섬김으로 주어진 사명을 능력 있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는 말씀은, 주님의 살과 피 곧 진리인 성경 66권의 말씀을 먹이라는 의미이다. 바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2. ( )는 말씀은, 성도들을 열심히 심방하고 말씀을 가르쳐 주며 기도하여 진리 가운데 인도해 주라는 뜻이다.
3. ( )는 말씀은, 변화가 더디고 시험에 드는 사람, 병들고 상한 영혼들을 더 큰 사랑과 섬김으로 돌보는 것을 말한다.
● 알고 넘어갑시다!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을 의로 여기고 그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며 천국 열쇠를 주셨다(마 16:19).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생명 다해 주님을 증거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다.

